나라를 되찾기 위한 국민들의 뜨거운 만세 열기, 어느덧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기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서, 지식인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뤘다. 

3·1 운동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제주에서는 '조천만세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이 가속화했다. 조천 만세운동은 제주의 관문인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났다. 조천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천 만세 운동은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됐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의 상황을 이야기했으며, 이를 들은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됐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아왔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동지를 모으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 시위행진을 했으며 이후 3월 24일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전개된 조천만세운동은 시위 주역들이 체포되면서 종료됐다. 

그러나 조천 만세 운동이 종료된 이후 박세현과 김여석 등이 중심이 되어 궐기한 '기미격문의거'와 서귀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의 제주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탑골 공원에서의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항일 운동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제주중앙여고 2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