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깨어있는 지식인 맹자는 ‘4단 7정론(四端七情論)’에서 ‘4단’을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을 들었다.

여기서 취할 대목은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별하는 것이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이고 특히 언론·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사실이다.

서양의 깨어 있는 지식인 존 밀턴은 “진실은 반드시 두꺼운 허위와 왜곡의 껍질을 뚫고 살아 남는다”고 ‘진리 생존설’을 제기한다. 진실은 결코 땅속에 묻히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언론계처럼 수치심(수오지심)을 모르는 집단도 흔치않다. 한번도 청산이 없었고 개혁에서 제외된 때문이다. 친일 언론이 해방공간에 편승하고 독재의 나팔수 언론이 민주시대에도 여론을 좌지우지해왔다. 프랑스 드골이 나치 협력자를 처단하면서 언론인을 첫 번째 심판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언론인이 ‘도덕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언론(인)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고 얼어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 선비정신이 전제된다. ‘제눈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어찌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탓하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수구 언론은 스스로 자정력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만 찾고, 그것도 ‘입맛’에 따라 칼질을 한다.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듯이 신문도 진실한 신문이 있고 위선의 신문이 존재한다. 신문의 진위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4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논조와 기사가 개혁적인가, 수구적인가.

둘째, 국민화합·지역화합적인가, 분열적인가.

셋째, 내·외부 필진이 양심·민주인사인가, 독재 부역자 또는 토호세력인가.

넷째, 통일지향적인가, 냉전·분단고착적인가.

언론의 본령은 사실보도와 공정한 비판기능이다. 그 역할을 하는 기자가 얼마만큼 정의감과 역사의식이 투철한가에 따라 기사(논평)의 품격이 달라진다. 영어의 ‘critic’은 물론 히랍어나 라틴어에서도 비판은 ‘분별하거나 판별하는 힘’의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실이나 사상 또는 행동의 진위·우열·가부·시비·선악·미추를 분별하고 판별하여 그 가치를 밝히고 평가하는 인간의 고등정신이 비판행위다.

돌파리 의사가 육신을 파멸시키듯이 돌팔이 신문은 정신을 파멸시킨다. 정신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를 왜곡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에 상처를 입힌다. 오늘의 언론(인)이 왕조시대 사관의 역할일진대, 사관은 당대 최고의 덕·학·식·재를 겸비한 인재 중에서 골랐다. ‘신문쟁이’ 라고 어찌 다를까.

제주도의 양식과 지성을 대변하는 「제민일보」가 창간12주년을 맞는다. 서울의 「한겨레」처럼 언론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가 해직 당한 깨어있는 언론인들이 퇴직금을 모으고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신문 같은 신문’을 만들고자 창간한 신문이다.

당연히 지면에 진실이 배이고 역사의식이 넘친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폭정에 희생된 4·3의 진실을 규명하는 「4·3을 말한다」가 장기 연재되고, 그 결과 대통령직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어 지금 여러 가지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이 「제민일보」만의 역할은 아니겠지만 새벽의 계명성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초심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나태와 안일이 따르고 오만과 유혹이 나타난다.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중절과 승리는 결정된다. 괜찮은 하나의 신문은 지역주민이나 국가의 축복이다. 여기서 ‘괜찮은’ 이란 자정력과 도덕성을 갖고 사실보도와 공정한 비판기능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등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문을 말함이다.<김삼웅·언론인·성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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