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YWCA회장·논설위원

국가간 쓰레기를 수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보도를 접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엔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한 폐기물이 제주 쓰레기라는 말이 믿기지 않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내 집의 더러운 쓰레기를 남의 집에 슬며시 버리다 들킨 것 같아서 낯 뜨거웠다.

이번 벌어진 부끄러운 쓰레기 반출 사태는 도정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처리능력을 초과한 쓰레기를 내다버린 제주도민 역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먼저 주민의 한 사람인 나를 기준으로 반성해 본다면 요일별 배출정책을 잘 따랐고 분리수거를 해서 종량제 봉투에 담아 클린하우스에 갖다 놓으면 그것으로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양손에 가득 찬 쓰레기를 바리바리 내다 버리면서도 문제의식이 없었다. '너무 많이 버린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고 '쓰레기를 줄여야 된다'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지 못했다.

1인당 쓰레기 배출량은 제주가 전국에서 가장 높다. 타 지역의 두배 가까이 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제주주민의 쓰레기만은 아니다.

관광객이 버리는 쓰레기까지 포함된 결과이고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관광객의 영향이 큰 것이 사실이다.

14~15㎝의 종이컵 1500만개를 한 줄로 세우면 그 길이가 1050㎞쯤 된다. 연간 1500만명 가량의 관광객이 제주를 방문하니 이들이 물이나 커피를 마시며 종이컵 하나씩만을 쓰고 버려도 제주도 해안도로 200㎞를 다섯 바퀴나 도는 폐종이컵 쓰레기가 발생한다.
 

제주도민이 쓰레기를 마구 버리면 관광객도 거리낌 없이 함부로 버린다. 우리는 관광객 때문에 쓰레기가 범람한다고 불평만 했지 쓰레기 발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주민이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면 관광객도 쓰레기를 버리려면 눈치가 보일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이외로 관광객에게는 통하는 경향이 있다.
환경단체나 전문가들은 일회용품 사용 금지, 쓰레기 처리시설 확충, 환경부담금 도입 등을 대안으로 꼽으며 고심하고 있지만 주민들이 솔선해 쓰레기를 줄여나가는 것이야말로 쓰레기 처리문제 해결을 위해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방향이 아닐까.

주민의식의 변화와 함께 정책결정자도 변해야 한다.
최종정책결정자가 도지사라면 최종책임 또한 도지사의 몫이다. 쓰레기 처리가 한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평범한 제주도민도 알고 있으며 걱정하는 사안일텐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서 방송을 통해서 문제의 필리핀 쓰레기가 제주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원희룡지사의 발언은 뜨악할 뿐이다. 도정 최고 책임자가 할 말은 아니다.

보고체계도 문제지만 "보고받지 못했다"는 말 속에는 질문해본 적이 없었다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위기의식은 커녕 관심조차 없었다는 고백일 따름이다. 조사,감사 따위를 통해 애먼 실무집행자를 닦달하기 전에 도백으로서의 책임의식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회천에 4만7000t 가량의 쓰레기가 적치돼 있고 처리 불가능한 쓰레기가 하루 70t씩 매일 쌓이고 있다.

쓰레기들을 비닐 속에 가둬 놨다고 그 안에 얌전히 들어 앉아 있으란 법은 없다. 그것들의 침출수를 내뱉어 땅속으로 스며들면 대기·토양·수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제주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쓰레기들의 반격이 재앙이 되기 전에 제주주민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정책책임자는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문제를 예측해 선제적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퇴계 선생님의 언행록에는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알고, 몸을 움츠려 덕을 닦으라"는 말이 실려 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새겨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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