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경 제주지방법원 부장판사

현실의 재판에서 법률이나 법관의 자세보다 훨씬 우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실' 인정이다. 재판에서 말하는 '사실'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유일한 '진실'과는 다르다.

재판은 오로지 '증거로 증명된 사실'을 토대로 법을 해석·적용함으로써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법언(法諺)이 "너는 사실을 말하라, 그러면 나는 권리를 주리라"이다.

'사실'은 '진실한 기억'과 다를 수 있다. 저명한 뇌 과학 교수의 책에 인용된 울릭 나이서(Ulric Neisser) 교수의 실험 사례를 보자.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우주 폭발 장면이 TV로 생중계됐다.

나이서 교수는 폭발 다음날 106명의 학생들에게 그 불행한 사건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들었나요"라고 질문하며 답안지를 쓰게 하고는 2년 반 후 그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전체 학생들 중 10% 미만의 학생들만 동일한 내용으로 답변했을 뿐이고, 다른 답변자 중 상당수는 2년 반 전의 답안지가 위조됐다고까지 주장했다. 일종의 기억의 배신이다. 저자는 생중계된 폭발사고, 즉 정말 인상적인 사고인데도 2년 반이 지나면 그것을 정확히 기억할 가능성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챌린저호 사례는 재판에서의 '사실' 인정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재판에서도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진실'은 일치하기 어렵고, 법관은 항상 '사실' 인정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며 좌절한다.

당사자들은 거짓말도 하지만 대개는 잘못된 기억, 즉 착각에 근거해 '진실'이라고 믿고 주장한다. 목격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같은 횡단보도 교통사고를 목격하고도 한 사람은 적색신호에, 다른 사람은 녹색 신호에 차량이 진입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거짓말이
아닐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그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진실'은 이처럼 증명이 되지 않거나 잘못된 기억인 경우가 많아 법관에게 결론을 내리는 전제인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당사자들이 승복하지 않는 억울한 재판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실' 인정의 장벽이 그 원인이다.

주장이 '진실'이더라도 증명되지 않으면 그 효과는 '거짓'과 마찬가지로 패소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패소는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컫는 다른 이름의 표현일 뿐이다.

재판은 당사자들의 주장과 증거를 천칭저울 양쪽에 올려놓고 '사실'을 규명하려 균형을 찾아가는 저울질과 같다. 절대적 진실을 토대로 합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이상적 재판을 위해서는 법관은 물론 당사자들에게 많은 시간적·경제적 노력과 희생이 요구된다.

저울질은 때로 잔인하게 우리의 인간성을 짓밟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거나 시련을 주기도 하며, 뒤늦게 의미 없는 승리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한 승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을 선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의 배신이라는 현실적 제약을 인정하고, 저울질 앞에 진실을 밝혀 상대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판결을 쟁취하겠다는 일념보다는, 양보와 타협으로써 신속한 분쟁해결과 건강한 관계회복을 이루는 쪽이 훨씬 아름답고 행복한 선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이 언젠가는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고, 누구나 현명한 선택을 하고자 고뇌한다.

천칭저울 앞에서 저울질을 기다리고 계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자 하는가. 마음을 진정하고 가까운 오름에 올라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조금 벗어나 바라본다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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