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거 500주년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벌이는 다 빈치 회고 행사가 올해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런데 다 빈치의 명성에 비해 그가 남긴 작품은 20점에 불과하다. 1만 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그 어느 예술가보다 이토록 유럽 전체가 들썩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0점 가운데 그가 주도적으로 그린 작품은 15점에 불과하고 나머지 5점은 제자나 동업자가 주로 그렸고 극히 부분적으로 다 빈치가 손을 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외 다 빈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지만 어디까지 추정에 불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당대에서 오늘까지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당대 최고의 미술사가 바사리의 언급에서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이따금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늘이 한 사람에게 경이로울 만큼 어마어마한 아름다움, 우아함, 재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신성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신에게서 비롯된다." 흔히 말하는 천재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 언급이다. 인류가 엮어온 미술사에서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 <성 안나와 성모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빼면 회화 역사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다빈치의 생은 결코 축복의 경우는 아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빈치 마을의 한 공증인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14세 때 베로키오 공방 문하생으로 도제교육을 받았다. 그가 공증인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 것도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음은 분명하다. 그는 일찍이 스승과 협업을 하는 동업자가 됐다. 스승이 그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피렌체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악습으로 인해 피렌체를 떠나야 했다. 당시 작업은 주문에 의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의 습성 때문에 일감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생전에 적지 않은 소송사건이 전해지는데 대개 주문 약속을 어긴 때문이었다. 몇 개월이 몇 십 년이 되거나 영영 주문자에게 돌려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바사리는 이 같은 성벽을 그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라 했다. 그가 주문받은 작품은 단순한 주문 제작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대상이었다. 그리는 것 자체에서 새로운 창조의 길을 열었다.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그를 가리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집요한 호기심을 가진 남자"라고 말했다. 

그의 완성작 몇 점에 비하여 그가 남긴 기록물 연구를 위한 메모, 계획서, 낙서 등은 7,200페이지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이 속엔 인간 해부도, 비행기 모형, 온갖 기계공학 연구 초안으로 빼곡하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해부학, 생리학, 식물학, 동물학, 토목공학, 기계학, 수력학, 무대 디자인 등 그의 호기심의 연속에 세속적 약속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지 않았을까. 

그의 대표작 <모나리자> 역시 주문 제작이었다. 피렌체의 상인 라 조콘다의 부인이 모델이었다. 16년 동안 화실에 두고 그린 이 작품 역시 주문자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미완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유로 갖고 있었고 그가 죽자 그의 후원자이자 열렬한 숭배자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사들여 루브르 수장품이 됐다. 그의 작품이 조국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있게 된 연유다. 이 작품은 유독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신비로운 미소가 많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으며 신비로운 미소를 갖고 있다." 다 빈치가 놓지 않았던 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준 선물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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