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영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논설위원

대한민국 어느 집단이고 기수와 연관이 없는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 초·중·고 그리고 대학 어느 곳에도 기수가 부여된다. 대학에 다른 것이 있다면 기수 대신에 학번이 부여되어 그것으로 인간관계의 기초로 삼는다. 물론 이 또한 기수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군대를 가도 기수가 존재한다. 또한,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현직에 임용되어도 법원, 검찰에도 기수가 존재한다. 어디 이뿐이랴 행정부, 경찰, 회사, 연예계 그 어느 곳에도 기수는 존재하고 그에 따라 구성원들이 행해야 할 행동양식을 우리는 기수문화라 칭한다.

이 기수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위력적이냐면 기세 시퍼런 장유유서(長幼有序)도 '기수빨'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니, 나이 어린 사람일지라도 기수가 앞서면 당당히 선배 대우를 받고 나이 많을 지라도 기수가 낮으면 몸소 자세를 낮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만약 그렇지않으면 '버르장머리 없다'는 뒷담화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수문화가 자기들 집단과 공동체 안에서 순수하게 선배기수를 존경하고 후배기수를 사랑하는 사적인 기능만을 가진다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특징짓는 하나의 징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관(官)에서부터 필요한 인재를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선발하기 시작한 데서부터 그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 짓기 위해 기수는 탄생했으며, 이러한 제도는 사기업이나 사적 단체에까지 파급되어 기수가 사회 전반에 보편화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 탄생이야 어떻든 같은 기수, 이른바 동기는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며 이는 뒤집어 그만큼의 배타성을 띤다. 지연, 학연, 혈연의 다양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동기가 되면 그 모든 배경을 녹이고 동기의 세계에 집중하게 된다. 동기가 수직적으로 집적되어 기수체계가 구조화되면 선후에 따라 서열구조가 형성되고 이는 행정편의상 구분 짓기 위했던 기수문화는 취지를 벗어나 다양하고도 깊은 사적·공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 검찰총장 후보가 새롭게 지명되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얘깃거리가 나왔는데 바로 '기수문화'다.
사법연수원 23기인 후보의 전임인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사법연수원 18기이므로 '기수파괴의 파격적 인사'라는 것이 그 골자다. 새로운 검찰총장이 후보로 오를 때마다 기수에 관한 보도가 관행처럼 있었지만, 이번처럼 많은 언론사가 집중 보도한데는 다섯 기수를 뛰어 넘어 그 사이에 낀 19기에서 22기까지의 검사들의 진퇴가 조명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고위 검사 중 기수가 빠른 검사들은 사의를 표명했고 또 그 수는 늘어날 수도 있다. 후배 기수에서 검찰의 수장이 지명되면 선배기수부터 동기검사까지 사표를 쓰는 문화는 서구라면 놀라움을 넘어 이상한 문화라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기수가 만들어지고 기수문화가 생기는 것은 가치중립적이다. 동기들끼리 친해 경조사를 챙기고 화합하자는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이유는 더욱 없다. 문제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것이 공적인 기구의 제도와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면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후배 기수가 총장에 오른다 하여 선배인 그리고 동기인 사람이 사표를 쓰고 용퇴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사요 의지라고 할 수 있지만, 직무의 성과와 비위의 유무에 따라 공직의 진퇴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생각에 비추었을 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기수가 늦은 사람이 승진했다는 사실로 인해 다른 공직자가 옷을 벗어야 하는 문화는 사라졌으면 한다. 공직자는 오직 국민의 일만을 생각하고, 기수의 선후가 아닌 국민의 관점에서만 직무에 임해야 하는 공복(公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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