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찬 서예가·시인 논설위원

강력한 태풍 크로사가 일본 땅을 관통하는 지난 8월 15일 광복절 날 오후 1시30분 제주국제공항 대합실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제주 서예인 12명이 모여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놓고 떠나온 서예인들의 마음에는 묘한 기분으로 가득 차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필이면 광복절 날 태풍을 타고 시류에 맞지 않는 일본 땅을 향해 가야만 하는 일정이 야속하기만 하면서도 일본 땅에서 우리 민족과 일본 교포들이 한글서예의 축제를 열고 있다는 뿌듯한 감흥도 느껴볼 수 있었다.

일정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탄 비행기는 과연 그 태풍을 뚫고 동경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간대를 맞추어 태풍경로를 보니 하필이면 바로 일본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 상공에서 우리 일행이 크로사태풍의 눈과 만나야만 하는 시간이라서 더욱 걱정이 깊었다. 일본 상공에 접어든 오후 4시30분경 비행기가 흔들리며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상상태로 비행기 흔들림이 있으니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는 방송이었다. 밖을 보니 짙은 구름이 발아래에 잔뜩 깔렸었는데도 항공기 주변은 매우 맑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저 구름이 분명 태풍 크로사일텐데 어떻게 이 비행기는 거침없이 태풍 속을 뚫고 손오공처럼 태연히 날아가고 있을까라는 의심에서도 신기한 기분을 안고 무사히 나리타공항에 안착했다.

지난 8월 17일 동경시의 한복판 우에노공원 안에 있는 동경도미술관에 280여점의 한글서예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는 1989년 재일동포들이 처음 민족서예단체를 결성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에 맞춰 일본 고려서예연구회와 제주한글서예묵연회, 서울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가 공동주최한 전시회라서 일본작가들의 땀방울과 함께 더욱 의미가 깊었다. 이 전시는 2년 전 일본과 서울과 제주 작가들이 한글서예작품을 가지고 제주한글서예묵연회가 주관해 제주에서 개최했던 '바다건너 제주에서 만나는 필묵교류전'에 이어지는 전시회이다.

특히 여기에는 한국 광주무등한글서예연구회, 일본 국제서화예술협회, 평양 만수대창작사와 김형직사범대학과 평양미술대학이 찬조출품해서 한반도 광복의 달에 일본 수도 도쿄에서 동북아 한글서예전을 열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아픔과 분단의 서러움 속에서도 문화예술의 행사를 위해 화기애애한 화합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무대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감동적이었다.

전시회장을 나온 우리 일행은 우에노공원 안에 크게 세워진 왕인박사 비를 찾아 역사공부를 했다. 이 큰 비석 옆에는 왕인박사 모습을 새긴 작은 비석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어로 '왕인박사는 4세기 말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암에서 탄생했다. 일본국 응신천황의 초청을 받아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황태자의 사부가 되어 충신효제를 가르쳤으며 일본에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한 학자로서 공자에 비유되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다'라고 새겨져 있어서 한국의 옛 성인을 일본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는 자랑스러움도 느꼈다.

기록에는, 왕인은 백제 근초고왕 때 태어난 대학자로 일본 응신왕의 초빙을 받아 구수왕(仇首王)의 문화사절로『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태자의 사부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조정의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데리고간 기술자를 통해 여러 가지 기술도 전했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에서 왕인은 고대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했다.

동경도미술관 전시장에는 불볕더위 속이었지만 월백풍청(月白風淸)을 그려보는 초가을의 문턱에서 한글의 미학을 손끝으로 여미는 서예가들끼리 서투른 언어의 소통 속에서도 서로의 추억과 향수를 나누는 기쁨으로 가득 찬 전시회 분위기였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