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삼 전 UNITAR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논설위원

공항에서 번영로를 가다가 성산일출봉 조금 못 미치는 샛길을 따라가면 상상치도 못한 시설물에 맞다 들인다. 과거 국가 통신시설로 사용하던 비밀벙커의 내부가 축구장 절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는데 통풍과 온도조절이 완벽해 연중 쾌적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설이 몰입형 미디어아트 "빛의 벙커" 전시회장으로 탈바꿈했다. 19세기 색감의 천재 미술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이 후세들의 첨단과학기술과 음악으로 한데 어우러져 새롭게 탄생했다. 시현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고 작품성은 세계 초일류급이다. 

세기적 작품을 선보이는 문화이벤트가 또 있다. 제주시 조천읍 우진제비오름 부근에 펼쳐진 '라이트아트페스타(LAF)'는 녹차밭 위에 빛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전시하며 내로라하는 조명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영국 예술가 브루스 먼로의 '오름'이라는 작품은 제주의 자연 지형을 예술가의 영감으로 재해석해 2만여㎡의 대지 위에 2만여개의 조명으로 재탄생 시켜 놓았다. 

세계 최상의 작품들이 제주에서 전시되고 이를 즐기기 위해 육지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그런데 제주도민의 관심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그간 문화 예술인, 문화 관계자의 노력으로 제주도의 전시 예술의 수준이 훌쩍 높아졌는데 막상 도민이 놓치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기운이 남아 있다. 직장일 끝나면 회식이나 술자리를 하는 풍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달려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그곳에 문화와 예술이 자리할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우리 사회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에 '저녁이 있는 삶', 그리고 스포츠와 문화 예술에 눈을 돌리는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패턴이 점차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문화 예술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으레 문화 예술 사설 부족, 예산 부족, 전문 인력 부족의 불평부터 쏟아지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제주도 비켜나가기 어렵고 오히려 더 불리한 여건이다. 타 지방 단체에 비해 전체예산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활동 자원에 대한 우선순위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관점을 뒤집어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전체 인구가 65만에 불과하니 서울 구 단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문화예술 시설을 인구 비례로 따져 보면 다른 지방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미 예술가 마을이 저지에 멋지게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미술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한라산 중산간에 마련된 본태박물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제주시에 위치한 도립 미술관도 문화예술회관도 멋지다. 서귀포의 예술의 전당이나 중문의 컨벤션센터(ICC)도 버젓하다. 거장들이 설계한 건축물도 여기저기에 늘려 있다. 어쩌면 도민들이 생활예술 자원으로 알뜰살뜰 활용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책입안 과정을 따질 때 흔히 '위에서 아래로(Top Down)'냐, 아니면 '아래서 위로(Bottom Up)'냐 방식을 비교한다. 문화예술 활동이야말로 '아래서 위로' 방식이 정답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주에서 문화 예술의 저변 확대를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제주에는 연중 관광객이 1500만명이나 다녀가며 점차 보는 관광에서 쉬고 즐기는 관광으로 바뀌고 있으니 문화예술 시장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다. 거기에 문화에 목말라 하는 65만 도민이 있다.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에 존경을 표하며 생활예술의 저변확대를 위한 이분들의 귀한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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