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오늘은 제4회 '금융의 날'이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겠지만 2016년 개명 전까지 '저축의 날'로 불렸던 오십여년 역사를 가진 국가기념일이다. 저축의 날은 1964년 국민의 저축의식을 고양함으로써 경제개발자금을 마련하고 아울러 가계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처음 제정됐다. 최초 제정시에는 농촌 수확기에 맞춰 9월 21일 개최됐으나, '증권의 날' '보험의 날'과 통합을 거치며 1984년 지금의 '10월 마지막 화요일'로 정해졌다. 

저축의 중요성과 위상을 반영하듯 초기 기념식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치사하고 표창했다. 대통령기록관에는 제4회 저축의 날(1968년)을 기념해 대통령이 직접 수기로 작성한 담화문 원고가 보존돼 있는데, 곳곳에 첨삭과 교정의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저축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짐작하게 해준다. '저축하는 국민 되고 자립하는 나라 되자'(1965년), '귀여운 자녀에게 저축부터 가르치자'(1971년), '하루 위해 낭비 말고 백년위해 저축하자'(1979년) 등 저축에 관한 표어가 적힌 현수막이 금융기관과 관공서, 마을 입구에 큼지막하게 걸리기도 했다. 저축의 날에 해마다 수백명의 저축 유공자가 선정돼 포상을 받고, 은행 창구에는 출시된 특판상품 신청을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통장의 개수가 부의 척도인 시대였다. 1960∼80년대 저축은 국민적인 운동이었고 '저축의 날'은 전국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우리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고금리 시대가 저물면서 저축의 위상도 함께 하락했다. 저성장 국면에서 내수 활성화를 위한 소비가 저축보다 더 큰 성장 동력으로서 부각됐다. 또한 낮은 금리, 빠른 집값 상승 등으로 저축 유인이 종전보다 작아졌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가계순저축률은 1988년 24.3%를 정점으로 최근에는 7%대까지 하락했다. 

그렇다면 이제 저축은 무용한가? 그렇지 않다. 소비가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소비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가계의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저축도 '미래 소비'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과소평가될 수 없다. 또한 합리적인 저축은 중장기적으로 가계의 재산형성과 우리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이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국민연금 등 사회안전망이 꾸준히 확충돼 왔으나 많은 가계는 은퇴, 실업 등으로 안정된 미래생활을 보장받기 어렵다. 특히 일부는 금융기관 대출상환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저축과 소비의 균형이 요구되는 이유다. 또한 우리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투자기회가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저축과 이를 기초로 한 적극적인 투자는 여전히 중요하다. 가계, 기업, 정부는 모두 축적된 재원을 바탕으로 저성장 극복을 위한 미래투자와 해외투자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는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내가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저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저축하라는 것이다.(I should say to young men, no matter how little it may be possible to save, save that little)' 또한 과거 제주인들은 밥을 지을 때 더 궁한 때를 대비해 쌀을 한두줌씩 항아리에 모아두는 절약을 습관화했고 이 항아리를 조냥단지라고 불렀다. 

힘든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살다보니 이러한 절약(조냥)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다. 개인이나 가계, 국가의 경우에도 밀물이 있으면 반드시 썰물이 있기 마련이다. 썰물에 대비하고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저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귀여운 자녀에게 저축부터 가르치자' '하루 위해 낭비 말고 백년위해 저축하자'는 구호는 아직도 유효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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