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시기 남양군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고찰해보는 ‘태평양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길’ 학술세미나가 제주대 평화연구소(소장 양정필) 주최로 지난 1일 제주대 박물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김정희 기자

제주대 평화연구소 1일 ‘태평양 전쟁의 기억와 평화의 길’ 세미나
전시체제기 본격 동원 시작…전황·점령군 따라 상황 크게 엇갈려

남양군도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태평양 전쟁때까지 일본제국이 위임통치하던 미크로네시아 섬들로 미국령인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등을 포함한다.

남양군도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선조들이 노동자로, 군속으로, 위안부로 끌려갔고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간 곳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시기 남양군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고찰해보는 ‘태평양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길’ 학술세미나가 제주대 평화연구소(소장 양정필) 주최로 지난 1일 제주대 박물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서 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연구원은 ‘태평양 전쟁기 남양군도 재류 한인의 전쟁체험’ 주제발표를 통해 “한인의 남양군도로의 이동은 1910년대 후반 노동자 모집으로 시작됐으며 전시체제기에 접어든 1939년 이후 본격적인 동원이 시작돼 가족이민, 출가노동자 모집, 관의 알선, 징용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졌다”며 “해방 당시 남양군도에는 7000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있었고 군속을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고 밝혔다.

또 “남양군도 재류한인들의 처지는 전황과 점령군에 따라 크게 엇갈렸다”며 “미군 점령지의 한인들은 일본인과 별도로 수용되고 자치를 하는 등 상황이 좋은 편이었지만 일본군 주둔지의 한인은 군의 통제하에 있었고 병사나 학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마셜제도 웟제섬에서 죽은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오가와 시오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리나이(마셜어로 ‘전쟁’)’ 상영후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웟제섬은 1941년 1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보급이 끊어진 상태로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며 일본 군인과 군속 등을 합쳐 3100명 중 1074명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웟제섬에 파견되었던 600명의 조선인 군속 중에 제주 청년 58명 포함돼 있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26명 뿐이다. 김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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