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미 취재1팀장·부국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말이다'하는 말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심심찮게 들리는 '번아웃'이란 단어도 그렇다. 낯설지 않은 데다 자신의 처지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도 않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5월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에서 번아웃을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의 하나로 최종 정의하고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판단했다. 초기 번아웃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그 이상으로써 일에 대한 열정이나 동기 부여를 얻지 못하는 상태, 그리고 한때 좋아했던 일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것을 지칭했다. 점차 일을 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보다 사명감이 '높은'에서 '요구하는'으로, 기대와 다른 업무와 업무량 등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취감을 얻지 못하는 까지, 슬프지만 끊임없이 진화 중이다.

꼭 집어 정리하자면 '보상 없는 과로'를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래서 혹자는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결정권 행사 여부를 번아웃의 주요 요인으로 본다. 과도한 업무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일을 포기해야 할 때 느끼는 분노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불충분한 보상, 공동체 내의 부조화, 불공정, 가치관의 대립 등에서도 번아웃은 온다.

사람만 그러한가 했더니 요즘은 '제주도'전체가 번아웃에 빠진 듯 보인다. 마치 계기판에 연료 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져 있는데도 계속 달리다가 덜컥 멈춰 서기 직전 자동차 같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입에 붙는 것이 번아웃이 오기 전 의욕이 사라지고 맥이 빠지는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한 해를 보내며 많은 일이 있기는 했다. 영리병원·비자림로·제2공항 같은 단어에 각각의 입장에서 핏대를 세워가며 목소리를 키웠다. 겨울채소 처리난에 산지격리와 보상 등을 놓고 부대꼈다. 한 때 천정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들썩이던 부동산 경기가 주춤거리며 제주 경제 전반이 움츠러들었다. 일자리며 골목상권 회생을 위한 온갖 처방에도 여전히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꺼낸 국가 균형발전 카드에는 서울 외 지역 중소도시를 제2·제3의 제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담아 제주의 좌절감을 부추겼고,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난다고 좋아하기에는 인프라 한계로 불거진 '오버 투어리즘'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보편적 '번아웃'을 피해 제주살이를 택했다던 40대와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20대의 탈제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고령화·공동화로 비롯된다는 '지방소멸' 경고등이 점점 신호주기를 좁히고 있다. '뒷감당은 누가 하나' '나아질 수는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손발에 힘이 빠진다. 그 와중에 한 쪽에서는 올 한해 한 것이 뭐 있냐고 따져 묻고, 한 쪽에서는 이 상황을 만든 책임을 추궁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뭔가 비아냥거리거나 지적할 것을 찾느라 분주하다.

사실 한 걸음 정도 떨어져 보면 뭔가 빠진 것이 보인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제주를 떠나는 것이 과연 일자리 때문인가 하는 문제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서울에서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서열화'나 애써 만든 지역 일자리의 결과가 역외유출되는 상황은 어떠한가. 행정기관 이전으로 균형발전을 실현한다는 혁신도시 구상은 서귀포 공동화로 이미 잘못 꿴 단추가 됐다. 제주 번아웃의 원인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통제 불능'과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12월이니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 다시 잘 해보자는 덕담을 감히 못하겠다. '해 넘긴' 또는 '해묵은' 일들이 이번에는 초장부터 번아웃을 부르기 위해 팔을 걷어붙일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 상황을 아포리아(aporia)라고 하지만 우리는 중용(中庸)을 안다. 번아웃은 증상이어서 원인을 알면 해결된다. 지금 제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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