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육성보전위원·시인·논설위원

엊그제 설도 지났지만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해서 거리에서 눈 구경은 어렵겠다.

그동안 연락이 두절된 것은 순전히 제 잘못 때문이지만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는 내막을 이제야 밝히려고 한다. 

사장님께서 낯선 땅인 제주도에서 사업 확장을 위한 광고를 접하고 내용을 알아보았더니 지점장을 하면 수익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는데, 마침 사장님과 저를 연결시켜줄 지인이 있어 보증금도 없이 지점을 개설하게 됐다. 이런 특혜는 제주도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 소개하면 믿음의 효과는 배가되는 지역 특성 덕분이기도 한다. 그래서 물건도 다른 지점보다 저렴하게 공장도 가격으로 공급 받고 팔았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 또한 제가 사장님보다 나이가 6세 정도 많다고 해서 윗사람 대접받은 예우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므로 저 또한 사장님께 최선을 다하여 평생 직업으로 삼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작년 늦가을까지는 잘 지내고 있었다. 제가 중병으로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항상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음식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렇게 건강관리를 지속하면 2020년에도 무탈하리라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지만 초겨울에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월말 정산을 하려고 본사에 들렀을 때, 사장이 이르기를, 문서로 주고받아도 될 일을 직접 방문하셨다고 반기면서 온풍기를 켜주시고 따끈한 유자차도 손수 끓여 주셔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잘 마셨다. 한 시간 정도가 됐을까, 이상하게도 목이 따끔거리면서 침 삼키기가 어렵다고 한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목이 따끔거림은 체험으로 독감이 왔다는 신호기에 귀가를 서둘렀다. 이튿날 아침부터 몸에 열이 나고 재채기에 콧물도 흘러 나왔다. 나는 면역력이 약해서 감기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의사 소견도 받았다. 독감에 걸렸으니 앞으로 20여일은 반 죽었다는 각오를 했다. 하지만 본사엔 사장님은 물론이고, 직원들이 근무하는 곳으로 나만 감기 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결과 천만다행으로 나았다. 작년 연말엔 지점마다 보너스를 받을 만큼 우리 사업체는 매출이 늘어서 사장님께서는 저를 따로 불렀다.

보람찬 마음으로 찾아뵈었더니 수고했다고 더욱 반기면서 귀인을 맞이하듯 온풍기를 켜려고 했다. 그 순간, 켜지 못하도록 제지하려다가 설마 온풍기 때문이겠냐는 안일한 판단에 켠 채 유자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벼루다가 금년 신년 하례회 때 식사하면서 사장님께 짜증을 섞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냈다. 제가 본사에 가면 온풍기 때문에 독감에 걸리니까 절대로 온풍기를 켜지 말아 달라고 강하게 못을 박았다. 사장님께서는 뜻밖의 불만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지켜보시더니 말씀도 없이 자리를 떴다.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나름 생사가 걸린 일이므로 배신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다고 갈등하다가 저지른 사고이다. 

그 후로 한 달이 넘도록 사장님과 연락이 단절됐다. 사장님께서 지점을 반환하라고 하면 해야 한다. 그 동안 받은 은덕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우선 용서를 빌어야 순리인 줄 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저는 위험천만한 독감이 나아서 두문분출하고 있다. 온풍기 때문에 독감으로 고생했지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매상을 올리려다가 더 큰 병에 걸릴 수도 있었음에 온풍기 덕분이라는 역지사지도 배웠다. 어쨌든 이 세상은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인연생기의 법칙이 있으므로 그 어떤 인연도 만남으로 시작된다. 사장님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사장님께서 이 편지를 읽을 것이다. 부디 넓은 도량으로 헤아려주시면 본사에 갈 때는 미니 히터를 들고 가겠다. 모쪼록 건강하고 사업이 번창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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