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내뱉는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내 말은 원, 할 말은 그것뿐이지. 옛날 과거의 말, 억울한 말, 얘기해봤자 무슨 소용 있어? 그래도 억울하다는 말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아니, 억울한 거 한번 말이라도 해봐…”

하지 못한 이야기는 그대로 한이 된다.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무려 50년을 기다렸던 사람들. 그들은 50년간 잊을 것을 강요당했다. 그네들이 보고 듣고 겪은 그 처참한 살육과 광기의 날들을.

질투에 사로잡힌 시앗이 밀고하는 바람에 전주형무소에서 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강정순씨(78). “모르쿠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악질 빨갱이라며 심한 매질을 당해야만 했던 이보연씨(74). 그리고 김춘배, 양근방, 강상문, 부성방, 양경찬, 정기성, 강서수, 양규석.

제주 4·3 당시 군법회의나 일반재판을 받아 감옥생활을 한 이들 10명의 증언을 담은 「무덤에서 살아남은 4·3 수형인들」은 개인의 기억이 재현해낸 서사적 진실의 한 장을 보여준다.

이들은 중산간 마을주민에 대한 소개령에 따라 피난을 갔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고(강정순) 3형제가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하고(이보연)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을 내려갔다가 주정공장에 수용되기도 했다.(양근방)

제주 4·3 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랑의 한 가운데서 개인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숱한 아픔을 그대로 이들의 몫이 됐다.

군법회의나 일반재판을 받은 이들은 적게는 1년, 많게는 무기형을 언도받고 전주·마포·인천·대구 형무소에 수감됐다. 일반재판을 받은 강서수·양규석씨를 제외한 8명은 지난 1999년 9월 국회 추미애 의원이 공개한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이들이다.

「수형인 명부」는 이들의 죄목을 모두 ‘내란죄’로 기록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기록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정식재판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의 진실과 역사의 현장을 살아온 개인의 기억이 말하는 진실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정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옥살이를 한 이들에게 세상은 50여년 동안 빨갱이라는 오명을 씌어 왔다. 이들은 연좌제가 두려워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서 살아야만 했고 평생을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시는 다시는 올 필요도 없고, 물으러 오지도 맙서. 전화도 하지 말고” 이렇게 다짐, 또 다짐을 한 뒤에야 비로소 엄혹한 시절을 회상해낸 이들은, 이야기를 풀어놓고 나면 일주일을 앓아 눕는다고 했다.

증언집의 주인공들은 4·3 당시 적게는 열 여섯에서 막 스물을 넘긴 나이였다. 천방지축 산과 들도 뛰어다니던 그들의 손과 발은 이념의 족쇄에 묶여 50여년의 세월을 지내야만 했다.

형무소 생활은 이들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를 기억해낸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때론 고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그리고 정당한 법 절차도 밟지 못한 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수형인 명부에 적힌 ‘내란죄’라는 죄목이 이들을 아직도 옥죄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들이 4·3 희생자로 선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수형인 명부라는 역사적 기록과 10명의 증언자들이 풀어놓은 개인적 기억과의 차이만큼이나 큰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4·3 당시 폭압적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개인의 아픔을 깨닫지 못한다면 제주 4·3은 과거가 아니라 현쟁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언집은 일깨워 주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 말이지. 이게(남북회담) 순조롭게 안 되면 이 문제(4·3 진상규명)는 또 어떻게 될는지 몰라. 그것이 완전 해결되면 몽땅 그대로 털어서 얘기 할 수도 있는데…”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남은 사람들. 독재권력에 의해 망각을 강요당해온 이들 증언자들이 온전히 그날의 기억을 되찾는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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