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수 제주관광대학교 교수·논설위원

요즘같이 우리 사회에 배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국어사전에 배려는 "짝처럼(配)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함(慮)"이라고 되어있다. 그만큼 역지사지의 정신이 배려라는 단어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지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배려없는 민낯을 보였다. 중국에서 시작된 우한코로나가 한국에 서서히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오만감과 열등감에 쌓여 중국의 눈치를 보며 국민의 건강과 삶의 가치를 정치적인 선반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했다.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자 그때서야 급한 불끄듯 조치를 하기 시작하며, 중국을 방문했던 우리 국민을 탓하고, 초기진압을 반성하기 보다는 특정 종교 정파를 비난하는데만 급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구·경북지역 주민들과 국민들은 조용히 또 자발적으로 서로 배려하기 시작했다. 점주는 임대료를 받지 않기로 하고, 있는 사람은 선뜻 금일봉을 내놓기도 하고, 타지역 의사와 간호사들은 생업을 뒤로 한 채 현장으로 달려갔다. 국민들이 먼저, 세계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배려의 삶'을 보여 준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배려를 찾기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언제나 그랬듯이, 또 하나의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은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통해, 삶의 가치를 재조명해 보라는 것과 우리 삶의 유리벽을 스스로 깨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인 배려에서도 그렇다. 얼마전 한 차가 일차선과 이차선을 오락가락하며 끼어들기를 하더니 내 앞차가 좀 천천히 가자 갑자기 옆으로 가서 창문을 내리더니 인상을 쓰며 빨리 안간다며 폭언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젊은이였고 욕들은 운전자는 나이 지긋한 중년 신사였는데, 그분은 주행선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주행속도를 지키며 운전하였는데도 욕을 먹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일, 자신의 욕구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가차없이 상대를 비난하고 마는, 배려없는 우리 젊은이들의 세태를 보게 되어 매우 씁쓸했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앞만보고 달려온 지난 과거에 대한 처벌이 아닌가 하여 부끄럽기까지 했다. 

죽음에 대한 배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모나 형제 등 가족이 말기암으로 인해 죽음을 앞에 둔 경우 대다수는 환자의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치료하게 된다.

환자가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일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자식들은 온갖 치료를 하는 것이 효도인 양 환자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다가 마침내 집에도 가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심지어 뇌사상태에 있다고 해도 주변에서 하는 소리를 다 알아듣기 때문에 집에서 편안히 가족의 위로를 받으며 임종하고 싶어한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가족의 잘못된 배려(?) 덕분에 환자는 썰렁한 병원 침대에서 혼자 죽어가는 경우를 보게 된다. 배려는 내 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삶의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다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배려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배려를 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한다. 

배려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음의 발동이며, 실천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다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해야 한다는 사회적 훈련이 부족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베푸는 배려는 내가 받게 되는 나의 미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많은 짐이 우리 어깨를 무겁게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의 입국을 막아 왔던 많은 국가들을 상대로 이미지도 개선해야 하고, 막혀있는 수출길도 열어야 하고, 지역경제도 살려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하다 보니 우리는 또 '배려의 삶'을 잊고 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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