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화가·논설위원

지난 1월 제주의 대표적 공공박물관 두 곳에서 유배에 관한 전시가 있어 보게 되었다.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개관 35주년 기획 특별전 <광해, 제주에 유배 오다>가 그것이다. <낯선 곳으로의 여정>에서는 우리에게 홍윤애와의 애절한 이야기로 잘 알려진 조정철의 30년, 262,800시간의 유배기간 중 제주 유배생활을 재구성한 영상이 전시장 초입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시를 짓는 것, 책을 읽는 것,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 뿐이었다.'라는 문장 속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대목에는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전시를 보는 내내 외로움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던 그들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지금의 우리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너희 지금 잘 살고 있느냐?'하고. 전시에 대한 여운이 남아있을 무렵 <광해, 제주에 유배 오다>를 보았는데, 광해가 4년의 제주 유배기간 동안 머물었던 집에 이중으로 돌담을 두르고 바깥에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친 '위리안치 유배형'을 입체 영상으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들은 작년부터 시작되어 마무리되었으나, 전시가 끝날 즈음에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는 국가 간, 도시 간 문을 걸어 잠그며 닫히고 갇히고 자유롭지 못한 상황들을 만들었다. 사회적 격리, 자가격리, 코호트 격리, 음압병상 등은 '유배', '위리안치' 등의 역사적 단어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8년 3개월 제주에서의 유배 기간 동안 독창적 필법인 '추사체'와 문인화 최고의 걸작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세한도'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논어 속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권세와 재력를 쫒는 세태 속에서도 유배된 자신을 대하는 제자 이상적의 인품과 의리를 칭송하며 비유한 글이다. 지금 같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는 '재난의 시기에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라고 해석해도 맞아떨어질 만큼 일상의 소중한 가치가 재발견되는 요즘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의 폭풍이 지나면 우리는 코로나19 발생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코로나는 삶에서의 가치 순위를 재고하게 했고,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등 긍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국제 간의 공조가 깨질 것 같은 위기감도 보이고, 국가의 통제가 만연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들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세계경제가 몰고 올 파장은 예견조차 어렵다. 다만 코로나 사태가 세계적 재난으로 다가오기는 했지만 인류사회의 속도와 방향을 재고하는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는 데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유배가 조선시대에 중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재앙은 우리가 했던 행동들의 잘잘못을 가려내고 제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멈춤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배 아닌 유배의 시간을 맞은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조정철이 절망 속에서도 '나'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성찰해 보면 어떨까? 김정희가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추사체'와 '세한도'를 탄생시켰던 것처럼, 지금과 같은 초연결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는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 궁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자신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게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더욱 좋겠다. 우선은 바로 코 앞에 다가온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부터 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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