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세상이 어지럽고 힘든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문학과 음악 같은 예술세계를 동경한다. 예술은 인간을 진실과 아름다움의 세계로 안내하고, 사람들에게 세상과 삶을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문학을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보루 위에서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해 비판하고, 과학 기술적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점을 폭로해서 올바른 삶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실존하는 인간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은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했지만, 사르트르만큼 일생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한 사람도 드물다. 프랑스 실존주의가 나름의 독자적인 방향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중심에 사르트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자보다 작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이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아버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어린 사르트르는 외가로 갔다.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에서 마음껏 책을 읽는 지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열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재혼했고, 다시 이방인처럼 자라야 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다른 사물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존이란 어떤 것일까? 가령 인간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자기를 내던짐, 즉 '투기(投企)'하면서 현재를 뛰어넘는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물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규정하지만, 인간은 거꾸로 미래가 현재를 규정한다. 인간은 미래의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자기를 내던진다. 인간 존재란 곧 선택을 통해 자신을 이루게 된다.

문학과 음악의 역할

문학에서도 사르트르 고민의 핵심은 문학을 통한 인간 구원의 문제이었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란 세계와 특히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선택한 자인데, 그 목적은 이렇게 드러낸 대상 앞에서 그들이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종이의 앞뒷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없는 문학과 예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한 것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구토」의 끝부분에서 주인공 로캉탱은 자신이 머물렀던 부빌이라는 도시를 떠나 파리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 회관에서 흑인 여가수가 부르는 '머지않은 어느 날(Some of these days)'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듣게 된다. 그러면서 로캉탱은 이 가수의 노래가 자신은 물론 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구원의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한다. 로캉탱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구토'의 상태에서 벗어나며 순간적이나마 행복한 감정을 맛보게 된다.

사르트르의 생각대로 한편의 문학작품이나 음악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구원을 줄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읽는 좋은 시 한 편과 음악 한 곡이 우리의 마음을 더 밝고 윤택하게 해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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