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몸이 아무래도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건강하고 활동에 별 지장은 없는 편이니, 내 경우 노인이란 단어가 아직은 좀 낯설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기성세대 중의 기성세대요, 분류상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지도 무려 10년이 넘어가니 더 이를 말이랴. 흔히 세상을 오래 살아온 노인에겐 경륜이 있다고들 한다. 여기엔 아마도 '노하우·경험·지혜·철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경륜'(經綸)의 사전적 의미는 그와는 사뭇 다르기에, 음가가 비슷한 '연륜'(年輪)이란 어휘로 대체함이 어떨까 한다. 어쨌거나 연륜의 산물인 노하우나 경험이 노인들의 자산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이를 지혜나 철학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흔히들 노인의 몸에선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한다. 매무새가 칠칠치 못하고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노인에게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게 비단 몸에서뿐일까. 우리의 사고방식과 언행에서 나는 냄새는 과연 향기로울까. 우리가 젊은이들로부터 '꼰대' 소리를 듣는 것은 사실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 아니리라. 이제는 그동안 기성세대 층에서 즐겨 써오던 이른바 '보편적 가치'니 '객관적 타당성'이니 하는 이른바 구시대적 기준들을 떨쳐버리자. 우리가 이런 고집스런 생각에 천착(穿鑿)해 있는 한 오늘의 오피니언 리더층인 젊은 세대와의 원활한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보편적 가치라는 게 원래부터 있기는 한 것이었는지를 찬찬히 따져볼 일이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오늘 같은 다원화 사회에서는 그러한 기준은 한낱 구시대의 노폐물로 치부되기 안성맞춤이리라.  

요즘은 전수(全數)나 모수(母數)보다는 그 요소인 개수(個數)가 더 중요하고, 총합(總合)이나 평균(平均)보다는 고유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가 더 중요한 시대다. 그리고 다수와 전체 못지않게 소수와 부분이 도드라진 시대다. 그러기에 '왜요?'하며 당차게 다가오는 반문에 대응할 수 있는 신사고가 필요하다. 시대와 세대 그리고 세태에 부합되는 감도 높은 프리즘이 요구되는 것이다. 

가령 이러한 오늘의 세태를 아노미(anomie)사회라고 규정해 버린다 치자. 그러면 문제는 끝났는가. 어쩌면 다원화 사회의 특징 가운데는 아노미적 요소가 필요악인 양 숨어들어 있는 게 되레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차라리 무질서한 듯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해내고, 혼재된 가치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들을 창출해 나가는 편이 보다 생산적이지 않을까. 요새 노인들은 한 살이라도 젊게 보이려는지, 천연색상으로 울긋불긋한 차림을 한 이들이 적잖음을 본다. 그러나 정작 젊어져야 할 것은 옷차림이 아니라 속차림, 즉 사고방식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언행을 움직여야 한다. 또한 젊은 세대를 훈계로 이끌려 하기보다, 그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세계와 서로 공감해야 한다.   

노인들이 예우받을 때 흔히들 쓰는 이른바 '경륜'이란 말은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는 사실 거의 안 통한다. 그때마다 '왜요?'에 부딪히게 되고, 점점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요즘 회자되는 말 중에 '나때'가 있다. 툭하면 나 때엔 이것저것 다 잘했었노라며 윽박지르는 소리가 하도 지겨운 나머지, 자녀가 되레 부모를 놀리며 하는 반항 조의 말이다. 앞으로 30년쯤 후엔 현재의 직업군의 60%가량이 사라져 버린다는 정보를 언젠가 접한 일이 있다. 그 정보의 진위를 떠나, 뭔가 시사하는 점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사실 우리가 만나보지도 않고 꿈꿔보지도 못한 미지의 세계를 열어나갈 22C의 주역들에게 줄 자산은 과연 무엇인가. 또 그것의 생산적 가치는 어느 정도나 되는가. 오늘의 이 글은 독자 제위에게보다 우선 필자 자신에게 보내는 글임을 고백한다. 문제도 해답도 바로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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