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섭 전 덕성여대 명예교수

개인이나 어떤 기관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사례를 역사는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힘이 너무 세고 거기에 분별력이 결여될 때 그 힘은 자주 재난으로 나타났다. 

일찍이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횡포(Tyranny of majority)'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실상 다수결의 원리는 행동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지, 다수의 결정이 반드시 옳아서가 아니다. 결과는 훨씬 나중에 열매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진리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온 세상이 다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 오직 갈릴레오 한 사람만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 

도덕적 판단의 기준도 다수가 그 척도는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도 다수결에 의해 독배를 들었다. 다수가 겸손해야 할 소이(所以)이다.

다수의 횡포의 뚜렷한 특징은 이견(異見)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21대 국회를 보건대 출발부터 이런저런 조짐이 우려할 만하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비판을 허용(똘레랑스)하고 수용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이며 '열린사회'라고 하였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부분적인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비판에 재갈을 물릴 수는 없고,  나와 다른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일찍이 원효 스님은 한 쪽 바퀴가 부서지면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한 쪽 날개를 다친 새는 날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화쟁(和諍) 이론의 핵심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새는 양 날개로 난다! 진보나 보수는 적과 동지, 선과 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모두 소중한 자산이다.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보수는 소중하고, 개혁을 위해 진보도 소중하다. 

민주적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국민통합에 있다. 우리나라의 갈등비용은 가히 천문학적 수치라고 한다. 이런 나라에서 세계 평화 운운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그 어떤 국정과제보다 단연 우선순위 첫 번째가 돼야 할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헨리4세는 국왕 즉위 연설에서, "프랑스의 국왕은 그가 공작 시절에 받은 모욕을 복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서

불안에 떨던 정적들을 단숨에 친구로 만들었다.

과잉확신(overconfidence)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민주적 지도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정부와 기업, 군 사령관, 지도자들이 확증편향에 빠져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저질러왔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의욕만 넘쳐서 빚은 귀결이라는 말이다. 냉정한 말이지만 위정자는 결과로만 평가 받는다. 설령 선한 동기라 해도 수만, 수십만 국민의 고통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이 가장 심한 곳이 진영논리로 나타나는 정치판이다. 이념이나 감정에 이끌린 확신이나 억지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공한 지도자들은 자기와는 다른 관점을 주의 깊게 듣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헤아리는 '감정이입적' 경청의 달인들이었다.

본시 성공과 실패는 공액(켤레)관계에 있다. 성공이 식탁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실패는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압도적 승리의 기쁨 뒤에 올 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세상사가 얼마나 허망하고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를 안다면 부디 겸손할 일이다. 

끝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배중율(A or B)이 아니라 함중률(A and B)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닐스 보어는, "참의 반대말은 거짓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의 반대말은 또 다른 심오한 진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진보와 보수를 모순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complementarity)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결사항전을 택한 김상헌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 두 어르신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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