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사는 고려의 비보사찰(裨補寺刹)인 동시에 몽골의 제주 지배 100년간 제주사회의 종교·정치·사회적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몽골족과 토착주민들의 종교적 안식처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제주문화예술재단 김일우 학예연구사는 5일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법화사 학술세미나에서 “고려 원종 10년(1269) 중창 이후 법화사는 제주에 거주했던 상당수 몽골족과 몽골족 가족·토착주민 등이 함께 찾았던 종교적 안식처로서의 위상을 지녔다”고 말했다.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 배경과 그 위상에 대한 일고찰’ 주제발표에서 김 연구사는 “법화사 중창은 △법화사가 고려왕실과 원 황실이 같이 신봉했던 관음신앙에 기초했던 사찰이었던 점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인 제주 서남부 해안지대와 가까이 위치한 지리적 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 연구사는 “중창 이후 법화사는 고려 후기 제주사회의 구심점 역할과 호국불교를 내세운 고려와 원의 국가적 입장이 중첩된 국제적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공주대 윤용혁 교수(역사교육과)는 “김 연구사의 △법화사가 원 황실의 원찰(願刹)로서, 제주거주 몽골인의 가족 및 토착주민의 신앙거점으로서, 그리고 고려의 비보사찰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은 논의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화사의 역사적 성격에 있어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법화사(주지 시몽스님) 주최·법화사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부평국) 주관으로 열린 이날 학술세미나는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려 법화사 중창과 역사적 위상에 대한 다양한 발제가 이어졌다.

고려대 민현구 교수(한국사학)는 ‘고려후기 고려와 원 및 탐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기조발표를 통해 △원 간섭기 제주가 원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가 제주에 대해 읍격(邑格)을 높이며 한국사의 본류로 들어서게 된 데에는 제주의 목마장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 성장도 상당부분 작용했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오상학 학예연구사의 ‘고려시대 법화사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송광사 성보박물관 한성욱 학예연구실장의 ‘법화사 중창에 관한 고고학적 이해’의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