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동, 시간을 모아 자산으로 2. 공동체 회복

혼자 아닌 함께…섬 기억·성장통 동시에 품어 
유배·항일·4·3 등 근·현대사 중요한 위치 차지
자연·인문 자원과 사람 어우러진 작업 의미 커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저서 「두번째 산」에서 '공동체'를 언급한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라는 대전제 아래 다섯가지 헌신을 말한다. 직업과 결혼, 철학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다. 오라동을 이야기하며 멀리 바다 건너에서 사는 이의 말이 무슨 의미인가 할 수도 있다. 저자가 두 개의 산을 오르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인생에서 살피는 '공동체'는 특별하다. 회복 과정은 매우 느리고 복잡하지만 그렇게 건강해진 공동체는 지역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오라동 인구 1만명 돌파 조형물
오라동 인구 1만명 돌파 조형물

△ 마을 지탱하는 유대의 힘

오라동 인구는 지난 2015년 1만명을 넘어선다. 이후 도내 다른 읍·면·동에 비해 빠른 인구 유입 속도를 보이고 있다. 제주시 시민복지타운 사업의 낙수 효과와 원·신도심 간 연결 통로로 교통과 편의시설이 확충된 영향을 받았다.

2019년 기준 오라동 주민(주민등록 기준)은 1만8334명·5822세대다. 전년에 비해 세대수는 4.6%, 인구수는 4.5% 증가했다. 인구성장률(2006~2016년)만 놓고 보면 도내 읍면동 중 3번째다. 유입인구 중 핵심생산가능인구(25~49세) 비중은 상위 5개 읍면동 중 가장 높다. 활동성이 높은 마을은 그만큼 성장·발전 가능성도 높다. 빠른 발전 속도로 주민의 요구도 늘어나면서 종종 성장통을 부르기도 한다. 보통의 마을처럼 주민간 마찰도 있고 편의나 발전에 대한 시각차도 있지만 비교적 원만하게 풀어내는 배경에는 문화·역사적 환경이 있다. 번영과 생존을 위해 마을 차원에서 함께 했던 '유대'다.
 

△ 살게 하는, 살고 있는

제주대학교 휴먼인터페이스미디어센터는 마을 구성원들과 사전 교감을 통해 오라동이 가지고 있는 생태·인문 자원을 정리했다.

제주시를 관통하는 3대 하천 중 하나인 한천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 북쪽에서 발원해 제주시 오등동, 오라동을 거쳐 용담동 용연(龍淵)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는 큰 내(川)다. 길이 약 16㎞로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이다.

오라동 한천 풍경 사진
오라동 한천 풍경 사진

발원지 부근에서 상류구간으로는 용진각·탐라계곡·삼단폭포 등의 비경이 펼쳐진다. 깊은 'V'자 골짜기를 이루며 흐르는 탐라계곡 곳곳에는 수직절벽이 형성시킨 이끼폭포·비단폭포 등의 폭포가 발달돼 있다.

중류 구간에 해당하는 오등동과 오라동 지경에는 예로부터 영주10경 중 하나인 영구춘화(瀛丘春花)에 해당하는 절경인 방선문(訪仙門)이 있다. 하류 구간인 오라동 주변에도 하천의 모습은 여전히 고지대 상류계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천의 하구(河口)는 용담동의 용연으로 이어진다.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통하는 길이었다는 용연은 선비들이 배를 띄워 낚시를 즐기고 달밤에 주연을 베풀어 시흥을 돋우던 곳으로, 영주12경 중 하나인 용연야범(龍淵夜帆)에 해당한다.

한천 근처에는 제주종합경기장·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있으며 한천을 가로질러 산록도로가 지나가고 한북교·연북교·고지교·한천교 등이 놓여 있다. 고지교 근처에서 한천은 지류인 토천과 합류한다.

역사와 생태, 문화, 사회상과 관련한 정보가 한천 하나로 연결된다. 여기에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이 보태진다.

사평마을에서만 50년을 살았다는 고춘자 할머니(89)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연삼로 개통공사(1990년) 때 큰 태풍으로, 또 2007년 태풍 나리로 인명피해가 났었던 일을 떠올렸다. 살아있음이 역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문화가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라동 4·3길의 의미

오라동에서 공동체 회복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또 있다. 제주4·3이다. 4·3 당시 최악의 유혈 사태를 촉발한 '오라리 방화 사건'은 마을에 큰 생채기를 남겼고, 제주 공동체의 강인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흔적이 됐다.

1948년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은 회담을 갖고 상호 전투 중지 등 4·28 평화 협상을 체결했지만 3일 후인 5월 1일 벌어진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파기됐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 청년단원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2채의 민가를 방화하면서 시작됐다. 제9연대가 우익 청년단원들의 소행임을 알아내고 미 군정에 보고했지만, 미 군정은 경찰의 보고를 토대로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간주해 강경 진압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양민학살이 시작됐고 이후 7년 7개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섬의 상처가 깊어졌다.

이밖에도 오라동에는 일제 강점기 제주를 엿볼 수 있는 망배단과 조설대 등 향토유적이 곳곳에 남아 오늘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 역사의 일부인 것들은 오라동 4·3길로 묶여 내일로 향하고 있다.
 

[인터뷰]고영자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소장

고영자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소장
고영자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소장

역사문화 아카이브 구축을 담당하고 있는 고영자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소장은 오라동을 자연·인문역사·생활 등 3가지 관점으로 풀어 설명했다.

오라동의 자연 요소로는 산록도로와 오름, 방선문과 함께 오라동을 따라 흐르는 하천들을 소개하며 "오라동 7개 자연마을은 모두 한천·병문천·토천 3개 물줄기 주변을 따라 형성된 공동체"라고 말했다.

이어 인문역사적인 요소로 4개의 '관전 포인트'를 들었다. 종합운동장의 존재와 1984년 제13회 제주전국소년체전이 열리면서 오라동이 제주 스포츠메카로 거듭났다는 점, 민간신앙에 대한 문화유산, 조설대, 4·3으로 잃어버린 마을들이 그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민간신앙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조사 과정에서 1914년 연미동(연미마을) 리사제(理社祭) 문서 등을 발굴한 사례를 소개했다.

연미마을 리사제 문서
연미마을 리사제 문서

고 소장은 "리사제 문서는 마을제인 포제의 의례절차를 각 음식의 위치, 의례 순서 등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중요한 자료"라며 "100여년 전 의례절차가 상세히 적힌 기록이 있다는 건 앞으로 100년 후에도 그 전통을 고스란히 전승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라며 자료발굴의 의미를 더했다.

이외에도 민간신앙 관련 자료로 신이 내려오기 좋은 장소를 포제단으로 꾸미기 위해 구매한 99㎡(30평) 규모의 1917년 토지매매증서를 발굴하기도 했다.

고 소장은 오라동 민간신앙 문화유산과 관련해 "오라본향당은 400년 수명의 팽나무를 신체로, 정실(도노미)본향당은 신혈(굴)을 신체로 보고 있다"며 "실제로 두 공간을 마주하면 '영험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라며 직접 방문해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정실(도노미) 본향당
정실(도노미) 본향당

주민들의 생활사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오라동 주민들의 근대 생활풍습과 유품을 포함한 고문서, 마을문서,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근대 생활도구, 옛 사진 등을 소개했다.

생활의 기본이 되는 식음문화에 관해서는 "제주는 모든 하천이 건천이라 옛사람들은 연못을 파서 물과 식수 등으로 음용해왔다"며 "옛말로는 '구릉'이라고 하는데, 오라동에 있던 20여개의 구릉에는 새구릉·웃구릉·버드낭구릉·알구릉·중구릉·족제비구릉 등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 현재는 간간히 터만 남아있는 곳을 통해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련의 조사과정들을 설명하며 "옛 생활상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연·역사문화유산들이 상당히 많았다"며 "지금 발굴해 전승하지 않았더라면 사라졌을 유산들"이라며 이번 사업의 의의를 강조했다.

오라동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 현재까지 조사·발굴한 문화유산들의 상세카드를 만든 결과 1001건에 이른다. 특히 각 마을의 어르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개인 물품 가운데에는 사평마을의 고춘자 어르신(89)이 시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887년(고종24년) 문과초시 급제 방목 문서도 남아있었다. 급제 방목 문서에는 상시관(上試官)의 수결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오라1동 송상보씨(66) 집안에서도 조부에서 부친, 아들로 이어지는 집안 대소사 문서를 소장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오라동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고 소장은 "제주에 형성된 마을들은 모두 비슷한듯하면서도 공동체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색깔을 가졌다"며 "이번 작업은 이 색깔들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발견하면서도,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가 됐던 작업"이라며 이번 아카이빙 사업에 대한 특별한 감상을 언급하기도 했다. 고미·김수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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