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옥 제주가족친화지원센터장·비상임 논설위원

'조용한 혁명'. 미국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1934-2021)는 1977년에 펴낸 책에서 전후 서구 선진 산업국가의 사회변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전 역사에서는 폭력을 동반한 물리적 혁명으로 정치 시스템이 바뀌었다면, 앞으로는 거대한 가치변화로 그러한 변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 들어 전후 경제성장으로 미국을 포함한 서구산업사회에서는 물질주의 가치보다 탈 물질주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물질주의 가치가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가치라면, 탈 물질주의 가치는 개인의 자율성, 표현의 자유, 양성평등, 환경주의 등 비물질적 가치를 말한다. 전후 경제번영 속에서 성장한 세대는 탈 물질주의 가치를 더 받아들이며 세대적 전환을 통해 탈 물질주의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점점 그 수가 많아질 것이다.

잉글하트는 이러한 가치변화는 그야말로 조용하게 일어나지만, 물리적 혁명만큼 큰 파급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의 연구 생애는 가치 전환을 통한 사회변동, 다시 말해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을 실증적으로 밝히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1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실시된 <세계가치조사> 글로벌 연구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그는 물질주의-탈 물질주의 가치의 나라별 분포와 그러한 가치 분포가 한 나라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데 힘썼다. 

이처럼 거시적 사회구조와 변동을 이해하고 예측하려면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일 생활 균형> ('일 가정 양립'이라고도 불림)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일고 있는 가치 전환을 가늠해 보게 한다. 2019년, 통계청은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34,147명에게 일, 생활(가정), 일·생활 균형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물었다.

전체 응답자 중 44.2%가 <일·생활 균형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일이 더 중요하다>고 밝힌 사람은 42.1%였고 <생활(가정)이 더 중요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12%였다. 같은 조사는 2015년부터 있었는데 2019년에 이르러 <일·생활 균형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이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응답을 넘어섰다. 2015년에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54%였고 <일·생활 균형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34%에 그쳤다. 불과 4년 만에 <일·생활 균형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10% 증가했지만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12% 감소했다.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의 큰 변화이다. 

이러한 가치 차이에 적지 않은 남녀 차이가 있다는 점도 관심을 둬야 할 사안이다. 2019년 조사의 경우, 남성 응답자 중 48%가 <일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면, 여성들은 34%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약 50%에 달하는 여성들이 <일·생활(가정) 균형이 더 중요하다>고 봤으나 그렇다고 본 남성의 응답 비율은 40%였다. 남성들이 원래 자신들이 있었던 일의 영역을 더 강조한다면, 여성들은 원래 있었던 가정의 영역과 새로이 진출한 일의 영역의 조화로운 관계를 더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남녀 근로자가 동등하게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할 수 있는 '가족 친화적 직장환경'을 만드는 일에 이러한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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