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가을이 깊어간다. 후미진 처마 밑 구석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거미가 아름다운 집을 만들며 이리저리 다니고 있다. 거미가 만든 집은 자기 삶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현장이기도 하다. 거미는 거미줄을 풀어 자신의 먹이를 구한다. 심지어 암거미는 사랑의 성교를 나누었던 수거미를 잡아먹거나, 자신의 몸을 새끼거미에게 먹이기도 한다. 거미의 삶도 인간의 삶만큼이나 치열하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거미는 늙어가고 까맣게 타버린 몸을 낙엽과 함께 내던진다. 그리고는 홀로 또 다른 새벽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가을바람에 떨고 있는 거미를 바라보면서 김수영의 시 「거미」를 읽어본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를 관통하는 정서는 '설움'이다. 설움은 서럽게 느껴지는 마음을 뜻한다. 시인은 무엇이 그리 서러운 것일까? 시인처럼 우리는 바라는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함에 서러워한다. 그리하여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설움은 언제나 무엇을 향한 욕망과 그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거미는 자꾸 우리를 서럽게 만든다. 언제 올지 모르는 먹이를 기다리며 어슬렁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거미와 다르지 않다. 

  1921년 11월에 태어난 김수영 시인은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시인은 20년이 넘는 작품 생활 동안 170편이 넘는 시와 평론을 합치면 2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의 변주곡」(1967), 「거대한 뿌리」(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1965), 「풀」(1968), 「시여 침을 뱉어라」(1968) 등의 작품이 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시작(詩作) 활동을 통해 끝없이 고뇌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삶과 문학을 일치시켰던 시인이었다. 그가 60년대와 1970년대, 80년대 참여문학과 민중시의 서막을 열어젖히며 시집 「거대한 뿌리」를 출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서 다시 거미 한 마리가 떨어진다. 으스러진 설움으로 까맣게 타버린 거미는 늙어간다. 우리도 늙어가며 희망도 말수도 줄어든다. 희망보다 절망을 바라보는 시간이 가까워진다. 또한 가을이 깊어가면서 마음과 몸이 애잔한 거미가 되어간다. '마음'이 전부이든 시간에서 '몸'이 전부가 된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몸을 위해 삼시 세끼 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몸이 있어야 숨 쉬고 몸이 있어야 일하고 몸이 있어야 거미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슬며시 슬퍼진다. 자꾸만 낯설어지는 내 몸이 전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치열해야 한다. 절망으로 자신의 몸을 태울 만큼 절망적이지만 그 몸으로 희망을 일구어내는 거미처럼 되어야 한다. 거미줄을 뽑아내면서 검게 자신을 태워가는 거미의 생처럼 우리의 생도 끝까지 치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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