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원 비상임 논설위원·제주곶자왈공유화재단 연구소장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渴而穿井)'는 말이 있다. 마땅히 이용할 식수원이 없는 곳에서는 얕은 땅속에 숨어 있는 물이라도 얻기 위해 우물을 팠다. 개인용 우물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우물도 있었다. 우물은 땅을 파서 물이 괴게 하는 토정(土井)과 바위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괴게 하는 석정(石井)으로 나뉜다. 과거 제주도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용암층을 깊게 파야 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한경면-대정읍에 이르는 서부 해안지대는 암갈색 비화산회토라 불리는 '진땅'이 대략 2~3m 두께로 분포하고 있어 토정(土井)을 축조할 수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토양층이 얇고 단단한 용암층으로 이뤄져 우물 파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역특성을 반영한 우물 파기

필자는 초등학생 때 구좌읍 하도리 면수동에서 처음으로 우물을 봤다. 그 마을엔 2개의 공동우물이 있었고, 염분이 많아 물맛이 짰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떠 물허벅에 긷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몇 년 전, 대정읍 영락리에 개인이 파서 이용했던 우물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1m가 채 안 되는 얕은 우물(土井)이었고, 지금도 물이 고여 있는 상태로 잘 보존돼 있었다. 이 우물로 한 가구의 식수는 물론 생활에 필요한 물을 모두 해결했다고 한다. 또, 구좌읍 한동2리 마을회관 옆에는 32m에 달하는 아주 깊은 우물(石井)이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이곳은 지대가 높아 해수면까지 파 내려가지 않으면 물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화약을 구해와 암반을 발파하면서 우물을 팠다고 한다.

 

탐라시대부터 우물 이용

제주 사람들은 용천수를 '나는물, 산물'이라 불렀고 우물물은 '통물'이라 했다. 둥그렇게 판 땅속에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이 마치 통에 물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제주의 물 이름에 '통물'이 있었다는 것은 우물 이용이 과거에 보편화돼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우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박혁거세 탄생 설화에서부터 시작되며, 조선왕조실록에 우물과 관련된 기사가 많다. 제주도의 경우, 언제부터 우물이 실생활에 이용됐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제주목관아와 외도동 유적에서 우물(13기)이 발굴된 것으로 미뤄 볼 때, 탐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성산에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영정(靈井)'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이 우물이 언제, 어느 곳에 팠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사용됐는지 등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제주시 외도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옛 우물터(고기원 촬영, 2002. 2. 23)
제주시 외도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옛 우물터(고기원 촬영, 2002. 2. 23)

 

60년대 초반 614개 우물 이용

1930~1937년까지 제주도의 물 이용실태를 조사한 마수다 이치지 교수는 그의 저서 「제주도의 지리학적 연구」에 당시 우물 개발과 이용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우물 개발은 1911년부터 시작됐으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제주성에 8개, 성산지역에 12개의 우물이 있었다. 1938년 발간된 일본중앙공업시험소 조사보고서에는 당시 식수원으로 이용됐던 15개 우물에 대한 수질조사 결과가 수록돼 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식수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축조된 우물(정호수)은 대폭 늘어났다. 1962년 급수현황에 의하면, 제주도 전체적으로 614개의 우물이 있었다. 대정읍이 176곳으로 가장 많았고, 성산읍(92개), 제주시(80) 순이었고 서귀포(8곳)가 가장 적었다.

 

봉천수는 중산간 지역 주민의 생명수

한편, 과거 물이 귀했던 시절엔 봉천수(奉天水)도 중요한 수원이었다. 봉천수는 빗물이 고여 물웅덩이나 못을 이룬 곳으로서, '죽은물, 물통, 못(池)'이라 불렀다. 용천수가 없는 중산간지역 주민들은 봉천수를 식수원은 물론 말이나 소의 급수용으로 이용했다. 1962년 식수원으로 이용된 봉천수는 도 전체적으로 365곳에 달했다. 제주시에 60곳를 비롯해 서부지역(한림 49, 한경 40, 대정 32)에 많았으며, 중문(4)과 서귀포(3)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가뭄이 들어 봉천수가 말라버리면, 주민들은 해안가 용천수를 우마차나 물허벅으로 길어다 식수를 해결했다. 더욱이 봉천수는 수질적으로 매우 불결했지만, 주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봉천수도 탐라시대 때부터 이용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봉천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과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구분되며, 물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 말을 이용해 바닥 다짐을 했다. 또, 봉천수가 더러워지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경비를 모아 주기적으로 수리하고, 당번을 정해 청소를 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새로운 봉천수를 만들 때는 제를 지내기도 했다.

한경면 저지리 주민들이 이용했던 '알수롱물, 밭수롱물' 봉천수(고기원 촬영, 2021. 12. 15)
한경면 저지리 주민들이 이용했던 '알수롱물, 밭수롱물' 봉천수(고기원 촬영, 2021. 12. 15)

 

사라져 가는 우물과 봉천수

우물과 봉천수는 50여 년 전까지도 제주도민들의 생명과 삶을 뒷받침해 준 귀중한 수원이었다. 그렇지만, 상수도가 집집마다 보급되고 생수를 사먹는 시대로 전환되면서 우물과 봉천수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선조들의 만들어 놓은 제주의 물 이용문화와 유산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용천수의 개발·이용 및 이용 발자취를 정립하기 위한 조사·연구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돼 온 데 반해 우물물과 봉천수는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과거 이용됐던 우물과 봉천수에 대한 구슬채록과 기초조사가 시급하다. 우물과 봉천수를 직접 이용했던 어르신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한다.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있는 우물과 봉천수 축조 기술을 비롯해 지역별 현황, 지역간의 차이점, 보수 및 관리, 이용과 관련된 규약 등을 조사·정리하자. 또, 조사 결과에 근거해 물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우물과 봉천수를 선정해 체계적으로 보전·관리해 나가자. 제주의 물 이용역사를 바로세우고, 물 문화유산을 보존·계승하기 위한 기반을 닦는 일은 우리세대에게 주어진 의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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