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 교수 겸 학장

1950년 북괴(北傀)군이 남침(南侵)해왔다. 이것이 6·25 동란인데 이때에 수도(首都)기능마저 부산으로 옮겨갈 만큼 남쪽으로 밀려나게 됐다.

안전성(safety)을 우선시한 데 따른 조치였다. 당시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는 안전지대로 주목 받으면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왔다.

그 제주도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에는 한국대학과 적십자병원이 옮겨왔다. 지각(地殼)변동과도 같은 큰 변화상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사람의 운명까지 바꿔놨다.

이것이 암흑시대(dark age)와 달리 희망찬 시대로 전환된 긍정적 모습이다.

눈에 띄는 것은 교육계를 향한 파급효과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대학마저 전무(全無)한 상황이었다. 이때 한국대학(오늘의 서경대학)이 피난해왔고 주민들에게 시혜(施惠)를 베푼 것은 물론 사람들의 운명까지 바꿔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됐다.

이 때 한국대학은 피난현장에서 학생을 모집했고 이는 개강(開講)으로 이어졌다.

강의(lecture)는 서귀초등학교에서 개최됐다. 수강생들은 대학에 목 말라했던 이 곳 교사들이 주축이 됐으므로 마치 수요(需要)가 있는 곳을 향해 대학이 옮겨온 모습이다.

강사(講師)진은 피난길에 오른 장도빈과 채필근 등 원로교수들이 중심에 서있었다.

전자는 단국대학 학장을 지낸 사학(史學)자고 후자는 동경제대 철학과 출신 목사였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몇 사람만이 직장을 그만 둔 채 상경(上京)과 더불어 학생신분을 유지했다.

그런 데 따른 효험인지 상경한 당사자들은 신분과 운명까지 바뀌었다. 이(李)모씨의 경우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으로 위상을 굳히면서 인명(人名)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명사(名士)반열에 올랐다.

강(康)모씨는 고향으로 내려와 교육감자리에 오르는 한편 김(金)모씨는 도의원이 됐으며, 또 다른 김(金)모씨는 고등학교 교장이 됐다. 모두가 한국동란을 맞이해서 희생해온 것과는 다르게 신분상승으로 이어진 긍정적 모습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보다 학력을 감추는데 급급해온 점이었다.

과거를 잊고 현재시간(present time)에만 집착해온 것이었다. 현재 사회지위를 떠올릴 때 졸업한 대학수준이 신분과 격차(隔差)를 벌릴만큼 평가를 낮춰온 데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이씨(李氏)가 제안한 한국대학이 머물었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주장마저 거부해왔다.

심지어는 이(李)씨가 중앙무대경험을 살려 고향발전에 헌신(獻身)하려고 시장으로 출마했건만 주민들이 수용하지 않았다.

암시로 다가오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객관적 진리(truth)에 가치를 두기보다 현실적 이해득실에만 몰두하며 유(有)·불리(不利)를 따지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대중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의 의식과 행동방식이었으므로 미래(future)의 시범(示範)상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난감하게 됐다. 심지어 미래에 희망을 거는 교육계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전통가치를 중시하는 동방예의지국(禮儀之國)에서 빗겨난 모습이다.

이처럼 미래의 희망을 찾는 일마저 난감하게 됐으므로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삼원(三元)성에 대해 재인식(再認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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