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귤을 수확하고 있는 이상복·원필연 부부. 초보 농사꾼 부부지만 얼굴에는 수확의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도시에서 인생의 쓴맛을 맛본 이들에게 농촌의 흙은 희망이었다. 한줌 흙 속에 눈물을 흘리며 희망의 씨앗을 소중히 키우고 있는 이상복·원필연 부부의 귀농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주>

“첫 농사가 참깨였는데 1500평에서 5대 정도 나왔지요. 그걸로 참기름 뽑고 1년 동안 아끼며 먹었지요.”

마흔을 훌쩍 넘긴 이상복씨(45·한경면 청수리)의 농사 경험담이다. 10년 넘게 서울에서 내로라 하는 엔지니어기업체를 경영하다 가족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난 99년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딘 이씨 가족은 한경면이 제2의 고향이다.

이씨가 부모형제, 친구, 명예 등 그동안 쌓아온 인생의 터전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생을 걷게 된 것은 보증을 잘못 서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연간 매출액이 703억이던 회사가 보증채무 7억6000만원을 갚지 못해 지난 91년 부도가 난 후 이씨는 직원들 퇴직금 정산과 빚을 갚은 후 조그만 월세방을 전전했다.

부인 원필연씨(42)는 지금도 월세방 생활을 잊지 못한다.

“막내 연재를 낳고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안나와 아기는 계속 울었죠. 이걸 보고 남편이 친구한테서 20만원을 구해왔는데 그 돈으로 전부 분유를 샀어요. 월세방이 분유로 꽉 찼던 그 날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이씨는 어려움을 겪고 다시 회사를 설립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시 공장자동화시스템도입과 관련해 국내에서 선봉장 역할을 했던 이씨에게 유명회사들이 많은 구애를 펼쳤지만 그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땀흘린 만큼 보람을 안겨주는 흙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그러다 이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저청중학교 살리기 추진본부.

학생수 감소로 폐교위기에 처한 학교를 살리기 위해 임안순씨(44·청수리)를 비롯한 지역주민들이 합심해 저청중학교 살라기에 나선 것.

이씨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98년에 한경면을 방문했죠. 우리 아이 3남매가 다닐 학교와 집, 농사지을 땅을 3차례에 걸쳐 돌아보고 확신했죠.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곳이구나’하고요”

이씨 가족이 처음 살던 곳은 저지리였다. 지금 살고 있는 청수리집으로 이사온 것 다음해인 2000년. 적당한 경작지를 찾다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참깨농사만 망친 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1600평 땅을 빌렸는데 잡초가 너무 많이 자라서 등에 짊어지는 분무기를 샀죠. 그걸로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 40분을 빼고 12시간동안 내내 25통의 농약을 뿌렸어요. 일을 다 마치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돌아오는데 이웃 할아버지가 ‘힘들게 하는 걸 보니 넌 농사 짓을 놈이구나’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셨죠. 정말 눈물이 나는 줄 알았어요. 이제 나를 농사꾼으로 받아주시려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하늘을 날 것 같았죠. 그때 그 할아버지가 차근차근 농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죠. 그리고 ‘경운기 같은 기계를 이용하라고’말이죠”

서울에서 공장자동화시스템만 10년 이상 연구해온 이씨는 깜짝 놀랐다.

“농사에도 기계자동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죠”

농사경험도 없었지만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이해할 수 없는 사투리와 어색한 주위의 시선들, 의지할 친척 한 명 없는 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농사자금을 구하기 위해 금융기관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보증인문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이씨 부부는 2000년에 빌린 경작지에서 감자 3000평과 콩 5000평을 수확해 처음으로 1000만원이라는 값진 노력의 결실을 얻었다. 작년에도 감자와 콩 농사를 지어 이제는 제법 농사꾼 부부 분위기가 난다는 것이 이웃들의 얘기다. 올해 초에는 낙천리에 1600평짜리 조그만 밭도 구입했다.

이씨 부부가 3년만에 농사꾼부부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을 주민의 일원으로서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 참여는 물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일단 이웃과 상의하는 태도 때문.

이씨는 “일단 모르면 부딪치는 게 제일 좋아요. 농사를 모르니까 물어보는 게 당연한 것처럼요. 제주에서 삼촌이란 말을 많이 쓰지만 전 성님 성님 하고 물어보면 정말 동생처럼 잘 대해 줍니다. 열심히 하면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까?”

이씨는 지난해 저청중학교 학교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고 부인 원씨도 마을회관의 사무장활동을 맡는 등 이씨부부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씨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다.

무농약 청정 농산물 생산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것이다.

“800평 정도 되는 과수원이 있는데 3년째 무후숙·무코팅 감귤을 서울 친지들에게 보냈더니 제가 키워낸 감귤만 먹겠다잖아요. 시장에 나오는 감귤과 다르다면서요. 청정 제주도답게 청정농산물을 꼭 생산할 겁니다. 그리고 농업 기계화로 효율적 농업경영인이 될 겁니다”

이씨의 눈이 반짝거린다.

농사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씨 부부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그리고 던지는 한마디.

“열심히 일해서 땀을 흘리며 수확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많이 힘들지만 편안하고 뿌듯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처럼 농사는 세상의 근본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거든요. 만물의 근본처럼 세상도 노력한 만큼, 땀흘린 만큼 결실을 맺고 욕심을 버린다면 한숨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해맑은 이씨의 눈에서 희망이 샘솟고 있다.<글=변경혜·사진=조성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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