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학교 교수 겸 학장

연합통신사는 「한국인명사전」을 발간하는데 '선구자(pioneer)'로서 역할해왔다. 1988년도에 최초로 발행한 책자에는 '5400명'이 수록돼있다. 그중에서 '제주도 출신'은 48명이므로 전체비율에서 0,9%에 불과한 숫자다. 당시에 제주도인구는 전국비율에서 '1.2%'다. 그러므로 인명사전에 '등재(登載)비율'은 여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만큼이나 '인재(人材)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생활기반인 토지마저 척박하므로 '지척민빈(地瘠民貧)의 글귀'를 실감해왔다. 눈에 띄는 것은 과거와 연계되는 '근현대인물'에서 전무한 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박충훈' '서경보' '현오봉' 등 셋이 등장할뿐이다.

박충훈(朴忠勳)은 제주읍성의 '칠성통'에서 태어났다. 상점을 운영해온 집안내력인지 학교마저 일본의 '동지사(同志社)고등상업'을 졸업했다. 그러면서도 항공기에 매료돼 광복 이후 '공군입대로 이어졌고, 장군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후 고위관직에 등용되면서 '상공부장관-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했다. 심지어는 비상시국에서 국무총리서리와 대통령권한대행까지 맡아왔으므로 역사에 남는 '제주도명사(名士)'로 남게 됐다.

국회의원으로는 현오봉(玄梧鳳)이 등장한다. 성산포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 흥국(興國)상업학교를 졸업했고, 이후에 '대륜광업소'의 전무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남(南)제주에서 4대를 시작으로 '다선(多選)의원' 반열에 올랐다. 중요한 것은 국회에서 '요직'을 맡아온 점이다. 

이것이 민주공화당의 원내총무(院內總務)이며 국회운영위원장과 건설위원장까지 겸직(兼職)해온 모습이다. 때맞춰 '국회의사당 건립업무'까지 주관했다. 이것이 오늘의 여의도에 자리한 '국회의사당'이다.

서경보(徐京保)는 도순(道順)출신이다. 인접한 곳에 자리하며 신라시대에 설립한 '법화(法華)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교계에 입문(入門)하면서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낸 '학승(學僧)'이다. 이후에 동국대학교 교수면서 불교대학장을 역임했다. 심지어는 일붕선종(一鵬禪宗)의 '총재'로 위상을 굳히면서 불교계에 기반을 둔 '국제적 활동'에도 힘써왔다.

이밖에도 제주 출신 교수들이 '인명사전에 등재된 비율(percentage)'에서 40%를 점유해왔다. 그만큼이나 '제주인의 우수한 두뇌'와 함께 '전통적 문사(文士)들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변시민 교수와 김상호 교수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1세대 교수'면서 중학시절부터 '유학길에 오른 선구자(pioneer)'들이다.

뒤를 이어 대학 시절에 출육(出陸)해온 '차세대 교수'들이 등장해왔다. 이것이 서울대 출신의 김영식교수인데 미국의 피바디대 유학을 거쳐 모과 교수로 발탁되는 한편, '교육개발원장과 교육부장관'을 역임했다. 강영희는 연세대에서 '부총장'을, 김영교는 고려대에서 '농대학장'을 각각 역임했다.

강병기는 동경대학교의 공학(工學)박사며 한양대 교수로서 도시계획분야의 '선구자' 위치에 있어왔다. 현평효는 동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제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김영돈은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제주대학교 교수와 민속박물관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지리학계의 신제(新制)박사 1호면서 동국대학교에서 학장과 교무처장(오늘의 부총장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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