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희 비상임 논설위원·㈔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우수와 경칩을 넘긴 계절은 춘분을 향해 달음질치며 봄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이제 벚꽃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유채꽃 등 봄의 색깔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개하면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그 흐드러지게 피는 봄의 향연 속에 올해로 76주년을 맞는 제주4·3의 엄숙한 시간도 있다. 1960년대부터 움트기 시작한 4·3의 진상규명작업은 두 세대를 뛰어 넘는 시간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많은 난관을 거치며 뚜벅뚜벅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시간이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도민들의 열망과 의지가 가슴으로 면면히 이어졌기에 이렇게 먼 길을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올해 4·3을 앞두고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하나는 지난주 오영훈 도지사가 임명하는 4·3평화재단 첫 상근이사장에 김종민 제주4·3위원회 위원의 낙점이다. 언론의 4·3취재반 활동을 시작으로 4·3의 역사적인 진실규명과 진상조사, 특별법 제정 및 개정 등을 기록 연구하면서 76주년을 맞는 시간의 절반에 이르는 37년 동안 4·3의 해결을 위해 천착해 온 인사로 꼽힌다. 필자와도 10여년 인연이 있는 선배님인데 늘 묵묵히 자신의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적인 영역에서 역할을 해온 만큼 보다 진전된 4·3의 정의로운 미래를 위해 내실 있게 임하겠다는 선배 또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역할을 했던 전임 이사장들 것처럼 잘 해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는 그동안 부조리한 이면을 꾸준히 파헤쳤던 정지영 감독이 다음해 개봉 목표로 4·3 관련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1990년 한국전쟁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 '남부군'을 비롯,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사회의 다른 시선을 제시한 '하얀전쟁', 1980년대 숨막혔던 군부독재 시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벌어졌던 고문의 실상을 재현한 '남영동 1985', 판사 석궁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 외환은행 먹튀 논란을 일으켰던 론스타를 모티브로 다룬 '블랙머니' 등 우리사회의 부끄럽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조리한 팩트들을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내 이름은'은 가칭 타이틀로 4·3때 잃은 어린 시절 친구이름으로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설정한다는대 공명과 울림이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그는 지난해 11월 개봉한 '소년들'에서도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부조리를 고발했다. 영화 '소년들'과 4·3의 공통점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존재목적인 국가권력이 오히려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해 희생자를 만들고 평생 멍에를 지웠다는 점이다.

정 감독이 스크린으로 하고 싶은 말은 공존과 배려인 듯하다.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컸던 소재들과 부조리한 현실을 다루는 그의 영화에 관심을 두는 이유일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스크린의 시선과 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4·3이 나아가려는 화해와 상생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기쁜 소식에 더해 하나의 기대를 덧붙인다면 진상규명을 거쳐 재심과 배·보상이 이뤄지고 있는 지금, 화룡점정으로 남아있는, 바른 이름을 갖는 정명(正名)작업의 논의다. 아직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명칭인 '제주4·3'과 어릴적 많이 들었던 '4·3사건' 외에 항쟁, 해방운동, 무장투쟁, 통일운동, 민중봉기 등 여럿 나오는데 논의의 물꼬를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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