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비상임 논설위원·봉성교회 목사

우리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올해 오스카 시상식에서 인정받았다.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셀린 송 감독의 첫 작품이다. 그의 아버지는 '넘버 쓰리'를 연출했는데 한국 영화계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족들이 모두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런 과정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영화에도 많이 반영됐다.

열두 살에 헤어진 친구를 열두 해가 지나서 온라인 영상통화를 통해 소식을 확인하고, 다시 열두 해를 넘겨 뉴욕으로 찾아가 만나고 온다는 얘기다. 그동안 여주인공은 결혼했다. 남편은 한국문화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늘 소통의 벽을 느끼곤 한다. 영어 제목과는 약간 다르게 우리말로는 제목이 인연인 듯싶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우리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도 나온다.

아르헨티나 영화 '붉은 실(2016)'은 안타까운 인연을 다룬다. 항공기 승객과 승무원이 서로 호감을 갖고 착륙과 입국 수속을 마친 다음에 만나기로 임시 약속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도착지 공항에서 돌발 변수가 생기자 만날 수 없었다. 서로 상대방을 찾으려 애쓰지만 성과가 없었다. 각자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생겼는데, 7년 후에 다시 우연히 만나면서 고민하게 된다.

양쪽 배우자들도 가수 혹은 사진작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가정을 이뤘다. 주인공들의 선택도 엇갈리면서, 옛 연인의 출현으로 인해 생겨난 가정의 균열은 어려움으로 남는다. 두 사람을 보고 어느 할머니가 인연으로 보인다는 덕담을 건네는데, 붉은 실이라는 표현은 남미에도 널리 퍼져 있는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50년 전에 소개된 '나자리노'가 지금까지 유일한 아르헨티나 영화였다.

프랑스에서도 범죄자들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 중에 '붉은 원(1970)'도 수입 상영됐다. 아랑 드롱, 이브 몽땅, 브루빌 등이 출연한 영화로 장 피에르 멜빌 연출이다. 당시 제목은 '대결'이었는데 이제는 '암흑가의 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통한다. 중요 등장인물 5명이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혀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감옥을 나오자마자 보석상을 터는 범죄 영화인데, 수사관 두 사람을 제외하면 세 사람이 되는 셈이다.

붉은 원이라는 제목과 주제는 인도 문화에서 차용했다. 우리 가운데도 인연과 악연을 불교의 교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힌두교의 세계관이다. 전생이 현생과 내생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숙명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해탈과 열반의 길을 불교에서 제시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진단만이 삶을 지배하곤 한다.

제주의 전통 사회는 혈연을 강조하지만 지역 공동체의 끈끈한 인연도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래서 마을의 이웃들을 모두 형님과 아우, 그리고 삼촌으로 부르곤 했다. 그 시대에는 사회안전망으로 작동해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경조사 챙기기'는 이제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시대가 됐다. 겹부조의 폐단을 불편하게 여기고 이제는 끊어내자는 소리도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아직도 살아 있다.

총선거의 계절에 들어서면서 다시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 등 우리 사회의 연고 관계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라와 지역을 큰 시각에서 판단하는 게 우선이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셈하는 것이 두 번째다. 연고를 적용하는 것은 그 다음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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