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나라의 천하통일은 법치가 그 토대였다.시황의 선대왕이었던 효왕은 개혁가 상앙을 재상으로 등용,가히 혁명적인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그의 개혁은 엄격한 법치의 칼날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됐다.백성들이 서로 조를 짜서 감시하고 연좌책임을 지도록 했다.범죄자를 고발하지 않는 사람은 허리가 잘리우는 요참형에 처해졌다.비록 귀족이라도 공적이 없으면 그 지위를 누릴 수 없었다.

 개혁의 초점은 지배계급에 대한 특권층의 해체이자,피지배계급에 대해서는 씨족(氏族)공동체의 타파였다.상앙은 개혁조치를 발표하기 앞서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된다고 생각했다.궁리 끝에 묘안을 짜냈다.아름드리 나무를 궁궐앞에 세워두고 그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이상히 여긴 백성들이 아무도 옮기려 들지 않았다.상금을 크게 올렸다.그러자 한 백성이 밑져야 본전이다하는 생각으로 나무를 옮겼다.상앙은 즉시 그에게 큰 상금을 내렸다.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 상앙의 생각이었다.

 상앙은 한편으로 귀족층의 특권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법을 엄격히 적용했다.왕자가 법을 어기자 왕자의 시종장인 공자 건을 엄히 처벌했다.왕자의 교육을 맡은 공손가에게는 몸에 먹글씨를 써넣어 죄인임을 밝히는 이른바 자자형(刺字刑)에 처했다.비로소 사람들이 법을 지키기 시작했다.그러나 상앙의 개혁이 성공하기까지에는 요참형이 행해지던 위수가 항상 핏빛으로 물들었음은 물론이다.

 4·13총선을 눈앞에 두고 불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나, 막말로 영(令)이 서지 않고 있다.법이 있으나 법같지 않고,법을 집행하는 사람 역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망연자실(?)이다.국민의 정부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으면서도 옛날 상앙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이 신뢰할만한 사전 조치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아직 늦지는 않았다.선거를 치른 뒤, 당선자를 중심으로 엄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될 것이다.

 개혁은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개혁가 상앙이 결국 그자신이 만든 통행증제도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것처럼...그랬다.크롬웰의 희생없이 청교도 정신은 없었고,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로베스 피에르의 속죄없이 프랑스의 법치는 없었다.국민의 정부 역시 선거후 위수를 피빛으로 물들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새천년 선거문화의 새로운 탄생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면.<고홍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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