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온통 제주도가 평화다. 10월 한달 내내 제주도는 평화로 넘쳤다. 4·3보고서 확정, 민족평화축전, 제2회 제주평화포럼, 정부의 4·3사과. 이렇게 4가지 평화 사업이 이어지면서 제주도민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제주 평화의 섬 열기를 한껏 북돋은 백미는 10월의 마지막 날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데 이어 따로 제주도민을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는 일정을 잡은 것 자체가, 무언가 제주도민을 향한 선물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기에 선물이 무얼까 하는 기대와 함께 혹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떠나 하는 불안이 교차했던 날이기도 했다.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는 언명은 5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고마웠고 감격했다. 정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은 격이었다.

만약 노대통령이 제주에 왔다가 평화포럼에 참석한 국내외 저명인사들만 만나 악수하고는 훌쩍 가버렸다면, 제주도민의 실망과 허탈은 분노로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50만 제주도민의 해묵은 한도 못 풀면서 무슨 동북아 평화공동체이고 평화번영이냐는 좌절과 울분이 10월의 마지막 날에 제주도를 휩쓸었을 거라고 보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노대통령의 4·3 사과 표명은 이렇게 제주도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공감대를 확인하고 재충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인식과 판단이 중요하고, 대통령의 남다른 역할이 있는 것일 게다.

10월 31일이 있었기에 11월 1일 현대·기아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이 동북아 경제와이즈맨 원탁회의"를 경제포럼 을 제주에서 개최하겠다는 언명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제 4·3의 한을 넘어서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이자 평화의 섬으로서 동북아의 평화번영을 추동해 나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재벌기업이 무슨 꿍꿍이 속으로 제주도에 미소 작전을 펼치는가 하는 의구심도 이번에는 없었다. 이렇게 제주평화포럼을 마치는 11월의 첫 날부터 정부와 기업 그리고 제주도민이 함께 손을 잡고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로 나아가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이틀간의 회의를 통해 평화포럼이 잘 난 사람들이 모여 한 마디씩 하고 지내다가 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실제로 이틀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사람 저 사람 던지는 조언과 비판, 정책대안들을 들으면서 지내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포럼을 호텔에서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참석자들 대부분도 호텔 밥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다만 호텔의 편리한 시설과 산뜻한 진행이 좋아서 돈이 좀 들지만 이용할 뿐이다. 그리고 돈이 들어도 성과가 좋으면 그것으로 유용한 것일 게다.

2001년 평화포럼 때는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하여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 답방에 대한 기대를 표시한 바 있고, 그래서 제주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번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평화포럼의 위상과 평화의 섬 제주의 가치를 높여 주었고, 이것저것 선물도 많이 주었다. 4·3 진상보고서의 정부 확정에 이어 정부의 사과가 있었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약속되었다. 4·3 비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인권과 평화의 교훈을 살리겠다는 다짐과 함께 4·3 추모기념 사업에 대한 지원도 뒤따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참여정부가 최우선 중점을 두고 있는 지방분권화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육성하겠다는 선물도 덤으로 받았다. 향후 동북아 6자 정상회담을 제주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사도 표명되었다. 언뜻 노무현 대통령은 표를 얻는 데 정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받는 만큼 주고 싶다.

<양길현·제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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