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현경대 의원과 변정일 후보는 오현고 동기동창이다. 두사람은 학창시절 줄곧 선두경쟁을 벌여온 수재들이었다. 그를 입증이라도 하듯 둘 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검사와 판사로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정치적 라이벌과 동지로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해왔다. 그러다 뒤늦게 다시 만나 ‘한배’를 탔다가 탄핵태풍에 휘말려 동반침몰 했다.

국회에 먼저 입성한 것은 변정일이었다. 그는 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총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다. 공화당의 원내총무를 지낸 거물정치인 현오봉 의원의 아성을 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출발부터 불운했다. 당선된지 꼭 1년만에 12·12사건이 발생하면서 헌정이 중단되는 바람에 첫 임기마저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게다가 81년 3월에 실시된 11대 총선에서는 집권여당후보로 나섰지만 낙선했다. 유신정권 몰락직전에 여당인 공화당에 입당한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그의 충격과 좌절은 바로 무소속의 현경대 후보에 패했기에 더욱 컸다.

이때부터 그의 정치적 시련은 기복을 더해갔다. 낙선에다 공천탈락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논리정연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법조인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제대로 꽃을 활짝 피워보지 못했다. 권모술수가 모자라고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에 반해 현경대는 비교적 순탄한 정치역정을 달려왔다. 서슬 시퍼런 전두환 정권하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집권여당 변정일후보를 누르고 금배지를 달았다. 12대때도 여유있게 재선됐지만 13대 총선때는 ‘목에 너무 힘을 준다’해서 무소속후보에 고배를 들었다. 그러나 그 뼈아픈 실패가 그를 ‘현폴레옹’으로 거듭나게 했다. 이후 내리 당선된 그는 집권여당에서 직선제 원내총무를 지내는가하면 거대야당 한나라당에서는 전당대회의장 등 굵직굵직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래서 도민들도 그를 중앙의 ‘비빌 언덕’으로 늘 의지해온 것이다. 하지만 야속한 탄핵태풍은 이번에도‘큰 머슴론’을 내세우며 한 표를 호소한 그를 6선의 문턱에서 무참히 날려버렸다.

이제 이들 두 동기동창은 육순을 훌쩍 뛰어 넘었다. 과연 이들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세대교체의 물결이 워낙 거세 재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도민들은 아직도 그들에 대한 향수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이들은 이번에 불출마한 북군 선거구의 양정규의원과 함께 지금까지 제주지역의 대소사를 잘 챙겨왔다. 4·3특별법과 국제자유도시 특별법 제정 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등 여당이 없는 공간을 나름대로 잘 막아온 것이다.

이제 이들 세 중진정치인들의 빈자리는 모두 정치신예들로 메워졌다. 따라서 새로 바통을 이어받은 세 젊은 당선자들은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분발해야할 것이다. 철저하게 다선(多選)주의로 운영되는 국회에서 초선의원들이 지역의 이익과 도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서는 중진들보다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형만한 동생이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진성범·주필>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