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섬 어디에 4·3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을까. 1948년 4월,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쳐질 정도로 미친 듯 불었댔던 광풍은 온 섬을 피로 적셨고 그만큼 현재를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소들을 무수히 남겨 놓았다.

올해는 4·3항쟁 57주년 되는 해다. 어디든 한번쯤 유적을 찾아 4·3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한다. 누구도 그 어느 곳도 피해갈 수 없었기에 따지고 보면 온 섬이 4·3유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을 하루에 다녀올 수 있도록 묶어 소개한다.

4·3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헛일인지도 모른다. 유적지를 찾아가도 아무런 흔적이 없는 곳이 태반이며 어쩌다 남아 있는 곳도 모르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이유로 여느 기행과 달리 4·3기행이나 유적지 순례에 앞서 공부가 필요하다. 가능하면 전문가와 동행할 것을 권한다. 현재 제주4·3연구소에서는 회당 10만원 정도를 받고 전문가를 파견해 주고 있다. 문의=제주4·3연구소 756-4325.

#4·3평화공원에서 낙선동 성터까지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한 4·3평화공원에는 제주도에 신고된 희생자 신고된 1만3735명의 희생자 위패가 시·군별, 마을별로 모셔져 있다. 위패 봉안실과 위령제단, 추념광장, 위령탑 등이 들어서 있다. 동부관광도로를 타고 가다 절물휴양림 쪽으로 가면된다.

제주시 아라동 제주여고 입구에 위치한 박성내는 조천면 관내 청년 100여명이 집단학살된 곳이다. 군인들은 철사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끌고가 총살한 후 사체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날의 흔적은 간 곳이 없지만 믿어지지 않는 역사의 현장이다.

일주도로를 타고가다 함덕을 지나 북촌으로 향하다보면 북촌교 조금 못미친 곳에 너분숭이소공원이 있다. 이 곳은 북촌리대학살을 상징하는 곳이다. 아무 죄없는 주민 400여명이 희생당했으며 실전 경험이 없는 사병들의 연습 사격용으로 학살이 자행돼 더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 학살된 시신들은 점차 수습됐으나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가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가까운 곳에 4·3전략촌의 성벽인 낙선동 성터가 있다. 이곳은 해안으로 소개된 선흘동 주민들이 1949년 봄 마을을 복구하며 낙선동에 쌓은 성.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된 것중 하나로 아직도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함덕교에서 동쪽으로 1㎞쯤 오른쪽으로 선흘리 방면의 도로가 보이는데 이길을 따라 3.1㎞정도 가면 낙성동 버스정류소가 있다. 인근에 은신처인 도툴굴과 목시물굴, 벤뱅듸굴도 있다.

#동광 헛묘에서 백조일손지묘까지
제주시에서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가사 금악 방면으로 내려서면 곧 동광 육거리 검문소가 나온다. 동광리 헛묘는 육거리에서 창천 가는 길과 대정 가는 길 사이에 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은 무등이왓 임씨 일가의 무덤으로 당시 작은 구덩이에 뼈들만 엉켜 있어 희생자의 시신을 거두지 못한 유족이 시신대신 옷가지 등을 묻어놓은 것이다. 이곳을 나와 육거리에서 주유소 옆길로 1㎞ 조금 못가면 오른쪽에 무등이왓 잃어버린 마을 표석을 만날 수 있다. 130여가구가 살던 마을은 4·3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 아직도 군데군데 모여있는 대나무가 그 앞이 집터였음을 웅변한다. 돌담들과 골목길 등 마을의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육거리에서 오설록단지가 있는 방향으로 900m 정도 가다 오른쪽길로 들어서면 삼밧구석 4·3위령비가 세워진 옛 마을터가 나온다. 역시 버려진 것이 아닌 잃어버린 마을이다. 46가호가 살던 곳이다. 오는 4월4일 잃어버린 마을 표석 제막식과 놀이패 한라산의 「사월굿 헛묘」공연이 있을 예정이다.

육거리에서 모슬포로 이동한 후 사계리로 향햐다 보면 사계리 마을이 보이는 큰 네거리를 만나는데 이 곳에서 제일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백조일손지지 안내 표석이 있다. 그 다음부터 안내판을 따라가보면 백조일손지묘를 만날 수 있다.

백조일손은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다’는 의미로 예비검속으로 1950년 8월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주민의 시신이 집단적으로 모셔져 있는 곳이다. 집단묘역은 1956년에 조성된 것으로 군당국때문에 6년동안 시신수습을 못하다 겨우 허락을 받았으나 시신구분이 어려워 집단으로 묘역을 조성하고 백조일손이라고 명명했다. 근처에 당시 학살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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