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원’이라는 배우와 광주 민주화 운동. 어딘지 모르게 엇박자라고 생각하는 시선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영화 ‘화려한 휴가’ 속의 이요원의 모습은 1980년 당시 광주에서 혼란 속에 휩쓸린 한 여성의 모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는 교과서나 TV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언급되면 그냥 보는 정도였어요. 그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몰랐었죠.”

1980년생인 이요원에게 당시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그저 간접적으로 들려오는 역사 속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광주에서의 일들을 영화로 만든다고 하길래 그냥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를 만드는가보다 했어요.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역사적 사실 보다는 드라마 자체가 좋다는 느낌이었죠.”

영화 속 사실에 대한 배경지식은 없었지만 아기자기한 영화 속 이야기들이 와 닿아 출연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영화 촬영을 하기 전 영화사 측에서 자료를 많이 주시기도 했고 저도 광주에 내려가서 돌아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배경지식에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알고 보면 당시 광주에서 그 모든 일을 겪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경악하고 울부짖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모르는게 약’이었던 셈.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아요. 광주에서도 시사회를 했었는데 광주분들은 펑펑 우시더군요. 특히 광주에서의 시사회는 숙제 검사 받는 느낌이었는데 ‘잘했다’는 반응이 많아서 한시름 놨어요.”

실제 광주에서의 뜨겁고 울분에 찬 반응은 물론이고 역사 속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대구나 부산의 관객들도 영화에 호의적인 반응이었다는 후문. 결국 출연자들의 모습이 인간적인 동감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결과물인 영화는 이미 나왔지만 사실 영화를 찍는 동안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특히 비장한 분위기가 흐르는 후반부에서는 스태프와 연기자들도 침울한 감정이 절로 들었죠. 감독님은 ‘밝고 행복한 모습을 찍고 싶다’며 힘겨워 하시기도 했어요.”

당시 광주의 중심가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 안에서 참혹한 배경을 두고 촬영에 임했으니 그 누구의 마음인들 편했으랴. 하지만 그런 감정 때문에 영화는 더욱 더 실감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 자체로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어요. 특히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성격으로 분한 저는 신이 연결되는 부분들, 그리고 후반부의 극적인 장면들로 넘어가는 모든 신이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라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렇게 찍은 영화를 보면서 이요원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배우 입장에서 보는 영화는 얼마나 현실감을 달성했을까.

“시사회 때, 처음에는 제 연기나 편집 등을 보면서 배우 입장으로 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금남로의 집단 발포 장면에서부터는 그런 게 안보이고 그저 펑펑 눈물이 났어요. 제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아서 더 슬프고 무서웠어요.”

‘화려한 휴가’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넋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적지 않다. 이요원 역시 그런 신들에 노출됐음은 마찬가지.

“촬영에 사용된 실탄 총기들에서 나오는 소리에 너무 겁을 먹었어요. 영화 속에서 놀라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김상경 선배는 제 비명소리에 더 놀랐다고 놀릴 정도였어요.”

실제와 다름없는 신들이 연속되면서 이요원은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몰입돼 갔다.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 시대 속으로 빨려 들어간 셈이다.

“피를 가장 많이 본 신이 병원에 부상자들이 실려 오는 부분이었죠. 폐건물에 병원 세트를 만들었었는데 더운 날에 인조 피가 사방에 널려 있으니 파리까지 들끓어 거기 서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였어요. 당시 상황은 얼마나 더했겠어요.”

그렇게 이요원은 겪지 못한, 또 가보지 못한 낯선 배경 속에서 보란 듯 연기를 해냈다. 1980년 광주 속 그녀의 모습은 오는 26일 개봉되는 ‘화려한 휴가’ 속에서 관객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노컷뉴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