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근·전업주부·작가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그림을 아십니까? 몽환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중섭선생님의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참 의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란, 피난길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하지만 미술관 옆, 선생님의 피난처를 보면서 짐작해봅니다. 수감자들의 독방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아내, 두 아이와 생활했던 궁핍함. 삶이 너무나 고단했기에 거꾸로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 하고요.

강원도 춘천아가씨가 제주도를 찾았습니다. 처음 방문한 제주가 좋다고, 서귀포가 너무 좋다고 그냥 눌러앉아버렸습니다. 비탈길의 헌집을 하나 빌려서 작은 카페를 열었습니다. 이중섭미술관 옆의 '미루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중섭거리에서 유일한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고, 화가들의 작품도 전시판매해 주었습니다. 창작자들의 놀이터(소통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서귀포 항이나 천지폭포를 산책했습니다. 때로는 항구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을 먹은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녀의 원래 직업은 소설가입니다. 글을 쓰다 손님의 이야기상대가 되어주고, 비 내리는 날이면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문화공간을 만들려 애쓰던 그녀가 제주를 떠났습니다. 처음 제주를 찾은 지 10년만의 일입니다.

2000년, 처음 방문한 제주의 풍광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행 뒤에는 상사병에라도 걸린 듯 잠을 이루기 힘들었고, 툭하면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산굼부리가 손에 잡힐 듯 자꾸 맴돌았습니다. 그래 적지 않은 시간동안 아내를 설득해서 제주도민이 되었습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내려왔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아내는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습니다. 아이는 40여일이나 등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평화, 생명존중을 가르침 받은 아이가 학교를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아내는 바빠서 스트레스를 받고 나는 일을 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 서로 힘이 듭니다. '서귀포(제주)의 환상'이 깨졌습니다.

도민이 100만은 되어야 경제가 활성화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가 좋아서 찾아온 사람들이 정착하지 못한 채 다시 떠나갑니다. 예전에 제주를 다녀간 육지인들의 잘못에 대해 뒤늦게 찾은 사람들이 책임을 추궁 받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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