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소설가)

올해로 4.3수난의 60주년을 맞는 우리의 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하다. 인간의 나이로 환갑에 해당하는 그 햇수를 의미심장하게 기념하기 위해서 목하 각종 행사들이 준비 중에 있다. 그 행사들의 테마는 일관되게 화해와 상생이 될 것이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우리는 이제 증오와 원한의 세월을 보내 버리고 화해와 상생의 새 역사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 무엇도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4.3 이후 승승장구의 일생을 보냈던 가해자들 역시 6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덧없이 늙어 그들의 희생자들이 묻힌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손자의 시대가 와 있는 지금, 우리가 증오와 원한이 아닌 화해와 상생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가해자 측의 사과가 없는데 무슨 화해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텐데, 물론 그것이 사리에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가해자 대다수가 세상을 떠난 지금의 상황에서는 생각을 좀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정부를 대신해서 현 정부의 대통령이 사과한 사실을 미흡하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화해의 단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논의에 앞서 4.3의 가해자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가해 집단과 피해 집단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두부모 자르듯이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가해자 집단에서 그중 악명이 높았던 서북청년단에도, 제주 섬 백성 다 죽이고 떠납니다, 하고 울면서 떠난 이들이 있었다는 증언에서 보듯이, 애초에 그들 대다수는 선량한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야수로 만든 것은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상부의 명령이었다. 특히, 상부의 극심한 의심과 감시에 시달리며 목숨을 저당 잡힌 채 동족으로서 동족을 공격해야 했던 제주 출신 군경과 청년단 소속 젊은이들의 가혹한 운명을 생각해 보자. 광주의 5.18에 가해자로 등장했던 군인들 중에는 훗날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데, 그보다 백배 이상의 대참사인 4.3을 치룬 그들에게 왜 정신적 외상이 없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가해자라기보다는 피해자에 가깝다. 그들 역시 국가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그 국가폭력의 구조에서 진정한 의미의 가해자는 명령을 내린 상부의 그들이다.

좌와 우, 그 어느 쪽 이데올로기도 인간의 몸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3만의 인간 신체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파괴당한 4.3의 대참사에서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4.3을 논의할 때 좌와 우 어느 쪽 이데올로기이든 간에 그것들을 배제함이 옳다. 오직 인간과 공동체만이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당시 항쟁의 주체로 나섰던 사람들의 혼백은 공산 폭도의 누명이 씌워진 채, 여전히 구천에 들지 못하고 허공중에 떠돌고 있는데, 이제는 편견이 없는 시선으로 그들의 본 모습을 응시할 때가 되었다. 그들 모두를 적색시하는 편견은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모른 채, 오직 침략당한 공동체를 지키려는 일념밖에 없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사태 때 살았던 사람들은 아이들까지도 ‘씨멸족’이란 말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토벌대의 대학살이 한 공동체의 붕괴와 멸종으로 보였을 때, 거기에 대한 저항은 종족 집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대학살의 와중에 벌어졌던 게릴라의 저항을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죄악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제주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태를 겪었던 사람들은, 비록 그가 가해집단에 속했을지라도, 혹은 항쟁 주체에 속했을지라도, 모두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피해자들이라는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 눈에 씌워진 오래된 편견의 콩깍지를 벗겨 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길이 열릴 것이다. 나는 십여 년 전 어느 여름 날 4.3을 취재하다가 시원한 팽나무 그늘에 4.3 때 과부가 된 두 할머니가 쌍나란히 사이좋게 앉아 있는 걸 본 일이 있는데, 한 분의 남편은 순경이었고 다른 한 분의 남편은 산군이었다.

현기영(소설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