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읍 금악리의 상징인 거문오름과 병듸못


◆병듸못·한새미(한림읍 금악리)
중천이물·조성동물(한림읍 상명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밤새 소낙비가 내리더니 병듸못의 물안개가 거문오름의 허리를 감쌌다.마치 선경(仙景)처럼 비쳐졌다.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찌꺼기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다.빗발이 굵어지면 취재에 차질을 빚을 것 같아 아침 일찍 서두른 게 오히려 병듸못의 비경(秘景)을 볼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 셈이다.

 해발 215m,중산간에 자리잡은 금악리는 바다와 접하지는 않았지만 물 복(福)이 많은 지,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병듸못을 비롯 거문오름의 화구호,한새미,생이물,갈래생이물,논아진밭물,무두와,일등이못,함케못,정물,새미소 등 사방이 물이다.

 병듸못은 옛날에는 이 일대에 주둔했던 군사들이 사용했던 물이라고 해서 ‘병둔(兵屯)물’이라고도 한다.

 마을 원로들은 그러나 이 말은 꾸며낸 말일 뿐,말그대로 ‘널따란 벌판에 자리잡은 못’이라는 뜻에서 ‘병듸(벵뒤·벵듸)못’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이견이 없다.이 때문에 병듸못은 옛 문헌에 한자말로 평대물(坪垈池)로 기록되고 있다.

 박남진 금악리 노인회 총무(66)은 이와관련 “금악리의 지형을 평면으로 살펴보면 동서가 길고 남쪽이 짧으며 동쪽끝이 뾰족하고 서쪽은 볼록한 삼각추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게다가 험준한 바위나 계곡이 없으며 다른 중산간 마을에 비해 지형상의 굴곡과 고저에 특이한 변화를 보기 힘든 평범한 지역”이라고 거들었다.

 병듸못은 금악리 마을이 형성되기 전인 약 420년전만 해도 늪지로서 산돼지를 비롯 각종 동물들이 물을 먹기위해 자주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4년부터 사람이 살게되자 축산업을 하게 됐고 이 일대를 우마급수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우마급수장의 크기가 747평이던 것이 1926년께 개인 토지 181평을 매수함으로써 우마급수장 면적이 928평으로 불어났다.지금 리사무소가 들어선 곳도 원래 병듸못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잉어가 많았으며 1962년에는 재건국민운동 당시 자매결연 기관인 제주도건설협회에서 시멘트 50포대를 지원받아 못 주변 돌담을 헐고 새 방축을 쌓게 된다.

 특히 이 물은 인근 상명·월림·저지리 주민들도 이용했기 때문에 1964년 가뭄이 심할 때는 그곳 주민들도 이곳에 와 바닥의 뻘을 제거하는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이어 1967년에는 이곳에다 붕어를 방류했다.

 못 깊이는 1∼1.2m가량 된다.또 못 입구에는 ‘유서깊은 마을 못’이라며‘연못을 보전하자’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러나 못 본래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못 서쪽과 남쪽으로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못 매립이 일부 이뤄졌고 98년에는 못위로 노인회관이 들어섰다.

 이 일대에 서식하고 있는 말즘과 검정말,네가래,마름,수련,붕어마름,골풀 등은 대표적인 수생식물.물속에는 물달팽이,물방개,드렁허리,붕어 등이 살고 있다.한때 이 일대에 서식했던 어른 팔뚝만한 잉어들은 1938년 가뭄이 크게 들어 물이 말라버리면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거문오름 북쪽에 자리잡은 한새미는 금악리의 대표적인 음용수다.한새미는 다시 대새미와 큰 한새미,샛한새미,작은 한새미로 구분된다.

 상수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멀리 저지리 주민들까지 물허벅을 지고 이곳에 와 물을 떠다 먹었다고 한다.

 강한순씨(53·금악리)는 “바닥은 진흙이고 빗물이 거문오름의 송이석을 비롯 자연적으로 걸려져 내려와 고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약수로 통했다”고 자랑했다.특히 수백년된 팽나무와 함께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어릴 때는 혼자 이곳에 가기조차 무서웠다고 한다.

 그러나 상수도가 개설되고 난후 지금은 관리가 허술해 옛 수질을 찾을수 없다.

 물론 아직도 깊은 곳은 수심이 3m나 돼 철책을 세워 어린이는 물론 방목하고 있는 우마조차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금악리에서 다시 저지리 쪽으로 지방도 1118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상명리 지경 도로변에 중천이물을 만날 수 있다.

 못 한켠에 서있는 팽나무는 수령이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수고가 13m이며 둘레가 3m나 되는 보호수다.면적은 도로확장과 함께 크게 줄어 50평방m가량의 조그마한 연못이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붕어를 풀어 동네아이들이 낚시를 할수 있도록 배려했고 도로변에 연못치고는 수질이 비교적 맑아 여름 한철 어른들의 쉼터로도 자리잡고 있다.

 못 이름은 지금부터 약 350년전에 금악리에 살던 홍중천(洪中天)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당시 홍씨 할아버지는 사냥을 위해 상명리쪽으로 자주 나왔었고 이 과정에서 식수원으로서 이 못을 발견하게 됐다.

 홍씨 할아버지는 그후 지금의 상명리 입구에 해당하는 제청동산 쪽으로 아예 이주했고 사냥을 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리민들은 못 이름을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중천이물이라고 불렀으며 이 물은 어승생 수돗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상명리의 식수원으로 활용됐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조사결과 이곳에는 송장헤엄치게와 붕어가 서식하며 흰꽃여뀌·소리쟁이·개구리밥·닭의장풀·애기땅빈대·큰개불알풀·자귀풀·가래·말·명아주·붕어마름·방가지똥·망초·보리뺑이·한련초·왕바랭이·강아지풀·민바랭이·돌피·큰고랭이·송이고랭이·방동사니아제비·물방동사니 등이 수생식물이 있다.

 조성동물은 상명리 남쪽 조성동 마을안에 자리잡은 연못이다.못 크기는 50평방m가량 되며 최근에는 물이 많이 빠져 검은 진흙과 물골을 드러냈다.

 탁류에 진흙과 수초가 어우러져 오래된 늪처럼 보이지만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금방 착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좌창성씨(45·상명리)는 “물은 사용해야 고인다”고 말했다.그는 “80년대 중반까지 우마급수장으로 활용되던 때는 소들이 바닥을 다져줘 물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축산업이 쇠락하면서 근래들어서는 여름장마 때나 물이 잠시 고일 뿐 건조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곳도 계절의 변화는 숨길수 없는 둣,풀섶을 헤치는 순간 쓰르라미와 개구리가 박자를 맞춰 울어댔다.그곳에는 이미 자연의 소리가 가을을 맞고 있었다.

△취재=좌승훈·좌용철기자
△사진=조성익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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