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신동 논못(한림읍 귀덕2리)
◈용흥동 조간대(한림읍 수원리)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다소 썰렁한 게 가을냄새가 묻어난다.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한림읍 귀덕2리 라신동 논못으로 간다.으레 이 맘때면 들녘의 벼이삭이 서서히 누런 빛을 띠게 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릴 시기다.

 그러나 5000평 규모의 라신동 논못은 더 이상 누런 벼이삭을 볼수 없다.수원리 용흥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10여년전에 이미 폐답이 된 상태다. 지금 그 자리는 담수와 염수가 만나는 곳에 사는 천일사초를 비롯 가막살이·부들군락이 저마다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한 가운데 세력확장을 위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또 논못 거의 모든 지역에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외래종의 털물참새피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게다가 논못 동쪽에 자리잡은 논물에선 아직도 물이 흘러나와 비교적 맑은 수질을 자랑한다. 취재팀은 이번 논못 취재과정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참게가 서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참게는 말그대로 ‘진짜 게’다.환경오염 탓에 그 흔하던 참게는 희귀한 먹거리가 됐다. 참게잡이는 대개 가을걷이가 끝나고 첫서리가 내릴 무렵 또는 매화꽃이 필 즈음의 이른 봄에 주로 이뤄진다.

 그러나 참게 맛이 아무리 좋아도 함부로 먹으면 아예 먹지 않음만 못한 수가 종종 있다.참게는 폐디스토마의 중간숙주인 탓에 잘 끓여 먹지 않으면 디스토마에 걸릴 수 있다.

 용출수인 논물은 아직도 수량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어서 주변에는 물을 끌어쓰기 위해 경운기 7∼8대가 항시 물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양춘선씨(53)는 “벼농사가 끊긴 후 논못 일대가 개발바람을 타지 않고 비교적 건강하게 보존되는 것은 땅주인이 수십명인 데다 각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땅주인이 크게는 300평 작게는 100평씩 소유하고 있는 데다 멀리 재일동포까지 조금씩 조금씩 땅을 갖고 있어 이 일대를 매입해 개발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논못은 남쪽은 바닷물의 진입을 막기위해 수문이 만들어져 있다.수문을 열면 금둘애기 코지와 용운동 포구쪽으로 이어진다.

 벼농사가 한창 이뤄졌던 80년대 중반 이전만 하더라도 이 수문은 염수피해를 막기 위해 밀물때는 문을 닫고 썰물때는 문을 열어 수량을 조절하는 등 요긴하게 쓰여졌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조사결과 이곳에는 흰여뀌·개여뀌·소리쟁이·쇠무릅·황새냉이·물닭개비·미나리·갯기름나물·골풀·부들·빗자루국화·모새달·참새피·털물참새피·큰골·파대가리·송이고랭이·세모고랭이·물방동사니·천일사초·개구리밥·좀개구리밥·곡정초·물질경이·네가래 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림읍 귀덕2리 장흥동(長興洞)과 장로동(長路洞)·라신동(羅新洞) 등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이가운데 라신동은 맨 나중에 형성된 마을이다.

 한림읍지에 따르면 ‘라신(羅新)’이란 마을이름은 고려 희종 7년께 제주에 현(縣)을 두게됨에 따라 당시 석전촌(석전촌)이라 불러왔던 귀덕촌을 귀덕현으로 개칭하게 됐고,현청(縣廳)을 설치하고 현령을 둬 다스리기 시작한 후 새로 생긴 마을로서 지세가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우며 해안절경이 뛰어난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지난 98년께 이곳에는 삼립하일라마리나콘도가 들어섰다.

 더욱이 지난 5월부터 해안도로 공사가 이뤄지고 있어 해안생태계의 파괴가 우려되고 있다.

 이 일대는 어로생활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귀덕2리 지경에는 소원·한걸이원·병단원·임수원·진작지원 등의 원담이 있다.또 용천수량이 비교적 풍부한 항벌러진 물·병단물·큰물·금둘애기물·조개원물 등의 용천수도 눈에 띈다.

 수원리 용흥동 조간대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환해장성의 일부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해안 용천수로는 엉덕물·쇠물·엉물·모신물·조근물 등이,원담으로는 오생이원·진원·서둘원·메기원 등이 있다.

 그러나 수질이 옛날과 달라 여름 한철 콘도 투숙객이나 ‘곰생이’‘먹보말’‘수드리보말’‘방게’‘조개’ 등을 잡아 먹을 뿐 이곳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고기잡이를 하는 이춘식씨(54·귀덕2리)는 “먹보말을 까서 보면 똥이 다 오그라들고…,우린 추접해서(더러워서) 못 먹는다”고 말했다.

 어황도 예전만 못하다.먼 바다의 불배에서 일찌감치 잡아버린 듯 근래들어 멸치떼가 이곳 원담까지 들어온 일이 없다.멸치가 들어온다는 것은 어장이 형성됐다는 증거다.환경오염으로 인해 어족자원이 고갈된 탓인지,이곳 어부들은 콘도 투숙객을 상대로 낚싯배를 운영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은 여름이 가는 소리를 듣기에 알맞은 장소다.

 바닷가 돌 틈으로 게가 쏘다니고 연두빛 바다와 아늑한 파도,그 위로 금빛낙조가 물드는 그 바다 말이다.그곳에는 여름한철 해수욕장에서 느껴볼수 없었던 호젓함과 차분함이 있다.

 물놀이 보다는 소소한 산책이,작열하는 한낮의 태양보다는 해거름이 어울리는 바다,지금 그곳에 가면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찌꺼기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상쾌함을 느낄수 있다.<취재·사진=좌승훈·좌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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