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자 제주도 여성특위 여성사정립분과위원장

   
 
   
 
오래전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몸부림쳤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녹록치 않은 현실과 이를 거부하지도 용인하지도 못하는 어줍은 자신으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떠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았다기보다 내 스스로 떠나지를 않았다. 하찮다 무시했던 소소한 일자리와 나를 귀찮게 했던 아이들과 관심이 없냐며 툴툴댔던 남편에 대한 미련 같은 것 때문이었다. 나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던 답답한 일상에 오히려 나 자신을 단단히 가두어버림으로써 나는 중년의 나이를 통제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늘 덧없는 욕망과 순간적 갈등으로 인하여 내 삶은 흐렸다 맑았다 흐느적거렸고, 가만히 있어도 먹어가는 나이에 공허함을 느꼈으며 열심히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능력의 부실함에 번민하였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다는 떠남에 대한 절실함만을 키우며 그렇게 사십대의 날들을 보냈다.

그런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있었다. 풍다(風多)의 섬에 살면서도 내내 그리워하던 미지의 세계. 진실로 떠나보지는 못했지만 수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 맘속에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수많은 섬들. 푸르른 하늘과 맑은 바다를 가르는 모호한 경계의 신비로움에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자유롭게 유영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도 복잡한 일상에 뒤엉켜서도 나는 늘 나의 섬을 유랑하며 가상속의 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그리던 섬을 만났다. 모슬포 항에서 십 여분의 뱃길로 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섬, 가파도를 찾은 것이다. 출항도 하기 전 먼발치에 보이던 점 하나는 쉼 없이 휘몰아치는 시퍼런 물결과 볼 살을 할키어대는 매서운 바람 사이로 메밀전처럼 평평한 땅덩이를 드러내더니 이내 동공 속을 들락거렸다. 머리위로 부서지는 섬 햇살에 나는 눈물을 훔쳐냈고 거칠게 부서지는 섬 파도에 묵었던 옹이를 토해냈다. 배에서 내려 섬을 밟기도 전에 나는 철저하게 그 섬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섬의 바람은 그동안 살아오며 참고 누르고 다졌던 마음 자락을 곳곳이 헤집어내서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섬 밑둥까지 곤두박질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나는 케케 묵었던 찌꺼기들을 끄집어냈고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현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힘들 때 떠나고 싶었던 나의 충동이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맘먹은대로 되지 않는다며 옥죄고 고민했던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풀어주기보다는 조이기에, 떠나보기보다 안주하기에 치우쳤던 것 같다. 어쩌면 떠날 수 있는 용기보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연초에 얻었던 삼백 예순 날을 보내고 새롭게 맞이할 또 다른 날들을 기다리고 있다. 세모의 끝자락에 새삼 따스함이 전해진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날 오라 손짓하는 섬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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