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 소설가

시간은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우리 사이를 지나간다. 고여 있는 듯 보여 안심하다 보면 벌써 저만치에 가 있는 시간. 신년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 절반이나 달아나버린 달력이 실없는 한숨을 짓게 만든다.

그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 얼마 전 우편함에서 꺼낸 시집 한 권이 생각나 꺼내들었다. 시집을 이리 저리 뒤적이며 마음에 드는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시를 암송하다 보니 어느새 여고시절의 설레는 감정으로 되돌아갔다. 등굣길에서 마주친 남학생의 선한 눈빛에 밤잠을 설치고, 친구의 고민에 함께 눈물을 흘리던 그때로....

나는 몇몇 친구들과 'Break Silence(침묵을 깨다)'라는 문학모임을 만들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난 다음날이었다. 성적과 대학입시에 매여 있던 소년들을 한순간에 매료시켜버린 문학이란 것에 감동을 받아서였다.

모임은 주로 자율학습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학교옥상이나 교실 뒤편에서 은밀히 이루어졌고, 공부를 하며 밤을 새우는 날보다 모임에서 읽을 시구를 찾느라 새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나는 특히 윤동주와 박인환의 시를 좋아했다. 글 한 획마다에 새겨진 시인의 도도함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구를 접할 때면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느껴졌다. 젊은 나이에 아깝게 저물어버린 그들의 짧지만 강렬한 생애도 한몫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문학모임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침묵 속으로 잠겨 버리고, 밤을 새우며 읽었던 시들도 시간너머로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들뜬 불면의 밤을 맞으면 그 시절에 외웠던 구절들이 불현듯 생각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 구절을 어둠이 드리워진 천장에 대고 그리듯 중얼거리게 된다.

그렇게 시를 암송하다보면 반쯤 설쳐 있던 잠은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심장이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달뜬다. 다시금 문학에 대한 열정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나를 달군다.

이미 내 맘속의 시인들보다는 훨씬 많은 생을 살았고, 그들의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뇌리에 박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들의 시가 오늘도 나에게 운명 같은 에너지를 안겨주는 것이다. /양혜영·소설가

"설레임이 멎었다는 당신의 말을/ 어느 숲길에서 떠올렸습니다/ 이파리 하나가/ 세차게 흔들렸습니다" (나기철 시, '구월' 전문)

손을 펴면 그대로 가려버릴 것 같은 짧은 시 한 편이 인생을 다시 설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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