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스토리] 시 쓰는 문화관광해설사 김창화씨

35년 공직생활 퇴임 앞둬 시인으로 새로운 꿈 얻어
문화관광해설사로 8년째 4·3 등 무거운 역사 앞에
감정함축 통한 공감 장점 잊혀지는 전통·정신 고민
 
"글을 쓰다 보니 입이 근질거렸어요. 누구든 내 얘기를 좀 더 들어줬으면 좋겠다 싶었죠"
 
2007년 등단한 김창화 시인(68·사진)의 명함에는 '문화관광해설사'라는 글자가 오롯하다. 35년간 공직생활을 했던 터라 '의미 없는 쉼'이 내키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가 밟아간 순서는 다소 의외다. 정년퇴임을 하던 해 '시와 창작'을 통해 등단하며 '시인'이란 꿈을 얻었고, 다시 1년을 준비해 관광문화해설사 자격도 따냈다.

덕분에 전국에서 몇 되지 않는 '시를 쓰는 문화관광해설사'라는 수식어도 얻게 됐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이야깃꾼'이란 별칭을 우선으로 꼽는다. 중세 유럽 음유시인이나 어릿광대 같은 역할이다. 그들이 입에 바른 소리만 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더왕 전설'이니 '원탁의 기사'니 하는 것들은 아예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8년 처음 항파두리에 배치됐을 때는 책에서 보고 배운 것을 옮기는데 급급했었다. 행여 모르는 것을 물어올까 긴장하는 일도 많았다. '8년'이란 경륜도 쌓였지만 공직자로 있으면서 놓쳤던 것을 채운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북촌 너븐숭이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제주4·3'의 흔적이 오롯한 시공간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가슴 한켠 묻어뒀던 오래된 숙제를 푸는 열쇠가 됐다.

4·3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당시 무장대에게 외숙모를 잃었던 아버지의 분노와 아픔은 어린 기억에도 절절했다. 어찌보면 그 기억 때문에 '반쪽'이었던 4.3에 대한 생각이 북촌 너븐숭이를 찾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원만해졌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여기에는 '애기무덤'이라나 것이 있다. 4·3 때 세상 빛도 제대로 못보고 죽은 아이들, 조막만한 유골 8구를 묻는데 돌밧(돌밭)이라 당시에는 흙을 위로 덮는 것 말고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무심한 비에 쓸려갈까 골(아래아)채로 도롱담 둘러쌓아 '아(아래아)총'이라 불렀다"

읊조리듯 풀어가는 그의 설명은 산문시 한 편을 풀어가듯 흐른다. 가끔 등장하는 감정이 함축된 단어가 부담스럽기는커녕 어두웠던 역사를 이해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도 김 문화해설사만의 힘이다.

그런 그는 요즘 고민이 많다. 1만8000신에다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제주에 요사이 통 '이야기'가 없는 것도 신경 쓰이고,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풍경들이 행여 제주가 지켜온 오랜 전통과 정신마저 흐리지 않을까 조바심도 난다. 

김 문화해설사는 "공직에 있을 때는 '정해진 대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렇게 세상에는 해야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며 "잊혀져가는 제주 이야기를 엮어 보다 진솔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더 뛸 생각"이라고 했다. 김봉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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