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주의보로 거리에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여럿 볼 수 있다. 걷는 데도 비상장비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게 슬프다. 인간의 문명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온갖 독소를 들이마시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마스크 판매량이 15배나 급등했다는 게 희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세먼지를 흡입했을 때 발생하는 가장 큰 증상으로는 알레르기 비염, 기관지염, 페기종, 천식 등과 같은 것이다. 어린이인 경우 특히 위험하다니 요즘 같은 날씨엔 햇빛을 쐬러 바깥에 나가는 것보다 안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거나 부득이하게 나갈 때는 마스크를 끼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한창 뛰어 놀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이런 경고가 들어먹힐까 싶기도 하다. 그들에게 놀이를 막는 건 숙막히게 하는 일이다. 

호흡기질환 얘기가 나왔으니 생각나는 풍경 하나가 있다. 어릴 적 살던 양마단지라는 마을 길에는 쑥대나무(삼나무)가 높게 자라 있었다. 쑥대나무는 담벼락과 붙어서 길과 밭, 밭과 집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은 쑥대나무 그늘 아래서 소꿉장난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이맘때 쯤 쑥대나무에는 노란 쌀알 같은 게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수꽃암꽃이라고 한다. 수꽃은 나무의 작은 가지 끝에 모여 달린 것이고, 짧은 가지 끝에는 공 모양의 암꽃이 달려 있다. 

소꿉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이웃집 보연이가 엄마역할을 했다. 나는 큰딸을 맡았다. 엄마역할인 보연이가 "쌀 받아오라"라면 나는 "네"하며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쑥대나무 앞으로 가서 쑥대나무 잎을 탈탈 털었다. 그러면 노란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노란 알맹이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애들이 얼굴에 분칠했다며 깔깔깔 웃었다. 노란 알갱이들을 주워 보연이 앞으로 가져가면 보연이가 널따란 돌 위에 올려놓고 밥을 지었다. 밥이 익을 때 까지 반찬을 준비했다.

주변에 있는 풀들을 모아 갖가지 나물반찬을 했다. 쑥이며 달래며 고사리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렇게 놀면서도 알레르기, 미세먼지…, 이런 생각을 못했다. 햇살 따가울 때 나와 해가 지도록 놀다 "보연아", "행숙아" 하고 부르면 모두들 엉덩이를 슬쩍 들었다. 소꿉놀이에서 먹다남은 밥과 반찬, 밥상 등은 넓적한 깨풀 같은 것으로덮고 쑥대나무 아래 고이 모셔두었다. 마냥 즐겁기만 한 한때였다. 

아파트 알을 거닐다 정겨운 풍경 하나를 본다. 꽃잎 다 떨어진 벚꽃 나무 가지에 속옷과 양말이 널려 있다. 연보랏빛 속바지는 고무줄이 늘어나고 엉덩이 주변으로 구멍이 숭숭 삐져나오고 있다. 한쪽은가지 끝에 걸쳐 있고, 한쪽은 노란 빨래집게가 고무줄 허리를 꽉 물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지 한쪽이 가지 끝에서 내려와 버리면 어쩌나 아슬아슬하다. 하얀 7부 런닝셔츠는 다른 한 쪽 가지에 걸려 있다. 모가지 부분이 축 늘어진 게 나이 여든에 가까운 내 어머니의 속옷 같다. 누렇게 바랜 색이 옷의 주인 나이와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옷걸이 하나가 가운데 가지에 걸려 있으나 '이게 무엇이 쓰는 물건이고' 싶다. 옷걸이는 런닝셔츠 팔 하나를 감고 있으나 본래 그런 용도는 아니었을 터. 왼쪽 팔 하나는 노란 빨래집게가 물고 있다. 그러니 노란 빨래집게 둘이 바지 하나와 런닝셔츠 팔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제접 센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런닝셔츠가 내 얼굴을 치고 바지의 발 하나가 내 허리를 친다. 기운없는 노인의 손과 발이 잠시 스친 듯 스산하다. 빨래를 치우며 얼굴을 드니 양말 두 쪽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각각 한 몫이라고 한짝은 제법 굵은 가지에, 다른 한 짝은 짧은 가지에 각각 걸쳐져 있다.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사물의 풍경이다. 

양말에 묻혀 온 저 꿈의 얼룩들이/아름다운 무늬가 되어서/아내가 돌리는 세탁기 안에서까지/깔깔거리고 쿵쿵대며/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발목/세상의 모든 숨은 꿈의 머리카락을 찾아내는/너희들의 양말/나는 그 꿈 속을 놀다 온 양말을 보면/덩달아 괜히 즐겁고/저절로 저절로 세상이 재미있어진단다(임찬일 시, '양말'중에서)

시인은 빨래통 속에서 돌아가는 양말들의 깔깔거림을 노래하고 있다. 아이들의 양말인가보다. 아이들의 양말이야말로 온갖 세상풍경을 다 담고 있다. 놀이터에서,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문구점앞에서, 신호등에서, 학원에서… . 그들은 한시도 쉬지않고 발을 움직였을 터이다. "가만 앉아 있어라"라는 선생님의 호통에도 발가락은 쉼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억압과 굴종을 뚫고 자꾸만 삐져나오는 발가락을 숨기려지만 아이들야말로 자신을 숨길 재간이 없는 순수 그 자체가 아닌가. 아이들의 양말은 한계절을 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들 양말은 늘 천원짜리를 산다. 막 신고 버리자고. 

삐리리리리리~, 양말에 고정 된 시선에 얼음을 끼얹는 자동차 클랙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시켜주는 경종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봄의 시골길이 아니라 문명의 사각지대, 허물어져가는 도시재개발 아파트 단지 102동과 103동 사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아파트 입구 나뭇가지 사이에는 "아파트단지?재건축?정비구역?지정?및?지형도면을?고시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제 떠나야 할 사람과 남아 있을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인가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인가. 

영화 '패터슨'(짐 자무쉬, 2016)에 나오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상을 다룬 영화다. 패터슨은 하루종일 버스를 운전하면서도 승색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약간의 휴식 시간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 풍경을 바라곤 한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나서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가끔 동네 카페에 들러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때도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침묵이 그의 말이다. 그의 모든 일상은 시적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고, 거리에서, 버스에서, 술집에서 주워온 영감을 백지에 쏟아붓는다. 그는 거리의 시인인 것이다. 

'패터슨'은 오래 여운이 남는다. 무심한 표정, 혼자 걷는 길, 도시락의 흔들거림, 개와 함께 산책길의 방향을 결정짓는 씨름, 손의 힘줄…, 이 모든 것들이 영화의 여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공백에 가까운 영화이다. 걷기의 목적도 그와 같지 않을까. 수많은 풍경 속에 들리는 목소리를 하나하나 불려내 말을 건네보지만 결국 침묵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 무수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존재의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는 공허를 느낄 수밖에 없는 길. 비로소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길. 이것이 내게 선물하는 걷기의 사유다.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재미는 쏠쏠하다. 걷는 것도 시간을 내어야만 하는 현실이 답답하긴 하여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허물어져가는 뼈마디에 햇살 주사 받는 기분으로 조금 걷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늦는다고 애석해하지 말자.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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