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마을 골목을 걷는 일은 늘 설렌다. 마을마다 빚어내는 빛깔과 냄새는 저마다의 언어를 갖고 있어 그 언어를 느끼고 해독하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낯선 사람이 마을길에 들어서자 동네개가 가장 먼저 목청 내어 인사를 한다. 그 소리가 인사인지 물음인지 명령안지는 모르겠으나 나그네는 그냥 인사였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오래된 돌담을 사이에 두고 길은 잘 포장돼 있다. '그냥 흙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늘 사는 사람과 어쩌다 오는 사람 사이에 생각의 간극은 있게 마련이다. 언젠가 동쪽 마을 해안가를 걷다가 우뭇가사리를 널고 있는 할머니를 만난 적 있다. 멀리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발각되어 "무시거 경 찍엄서"라는 볼멘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여서요."라고 대답했다가 호되게 또 한소리를 들었다. "일 허는 게 뭐 경 좋아? 놈 허는 일은 다 좋아 보여? 어이구, 설른 애기들." 부끄러워 얼른 자리를 떴던 그 날의 설른 애기!

마을 안길에는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군데군데 집들이 가지런히 앉아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히 정돈된 마을 모습이 이 동네 사람 부지런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올레길 끝에 거미줄 쳐진 집이하나 보여 들어서니 주인아주머니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나온다. 빈집이 아니었다.

아주머니 혼자 사시는데, 빈집이 있어도 관리하기가 귀찮아 그냥 뇌두고 있단다. 몇 해 전 주인양반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 산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주말마다 손자손녀들이 놀러오니 그럭저럭 외로운 건 없다고 수줍게 말씀하신다. 비파나무에 맺은 물방울이 주르륵 담벼락으로 흘러내렸다. 

마을을 돌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집마다 특색 있는 우체통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레인지를 재활용한 우체통, '개조심' 팻말이 붙어 있는 우체통, 빨간집을 닮은 우체통… 등. 우체통을 보면 늘 반갑다. 마치 기다리는 편지가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요즘엔 편지 받아볼 일이 없다.

물론 내가 편지를 쓰는 일이 거의 없으니 당연하다. 편지 한 번 받아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잘못 배달된 편지일지라도. 

편지 하면, 영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5)가 떠오른다. 눈 덮인 설산을 바라보며 "오겡키데스까"라고 외치던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역)의 가슴 시린 절규가 잠시나마 무더위를식혀준다. 한여름에 선풍기 켜놓고 보던 '러브레터'의 맛은 '설레임' 아이스크림보다 시렸다. 잘못 배달된 연애편지로 시작되는 얽히고 얽힌 인연, 추억을 찾아 헤매는 몽환의 여정, 각자의 사랑을 잊지 못해 설원을 떠도는 사선의 교차, 눈 덮인 오타루 시와 고베 시를 무대로 한 한편의 영화는 이제 한 도시를 먹여 살리는 좋은 스토리텔링의 모범이 되고 있다. 

앙드레 고르.

편지는 예로부터 사랑의 교신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철학자 앙드레 고르(1923~ 2007년)가 그의 부인인 도린에게 보낸  『D에게 보낸 편지』는 세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편지글이다. 앙드레 고르는 불치병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편지글을 통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죽음 직 전까지의 이야기와 마음을 담는다. 그들은 2007년 9월 24일 동반 자살한다. 삶도 죽음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D에게 보낸 편지』를 출간하고 나서 1년 후이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과 잘 통하는 당신은 내게 들판과 숲과 동물들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말을 하면 다들 어쩌나 당신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던지 마치 당신의 말뜻을 알아듣는 것 같았지요.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아니, 삶을 통해 당신을 사랑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결국은 그게 그 말이지만요.)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D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D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보면, "적어도 사랑을 하려거든 이렇게 해라!"라고 앙드레 고르가 말하는 것 같다. 여든 두 살의 부인을 보면서도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앙드레고르. 내년도 최저 임금이 10.9% 인상된다는 보도가 들린다. 앙드레 고르는 노동시장에서 최저임금의 필요성을 주장한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였다. 그는 여든 네 살이 되던 해, 부인과 동반 자살을 택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 중용의 미학을 보여준 장본인이 아닐는지.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부인에게 고백하던 그의 말이 생생히 들린다. 다음 생이 있다면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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