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들이 많이 열린 모양이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당시 항일운동의 주역이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이다. 더불어 유관순 열사는 독립유공자 1등급 포상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을 받게 되었다.  방송사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다루었다.

수많은 애국투사들 가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발굴되고 이를 알리는 특집 다큐멘터리는 흥미로웠다. 2019년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1만5000여명 가운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357명으로, 전체의 2.4%에 불과하다니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듯하다. 

다채로운 3·1절 행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곽예분 할머니께서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영면한지 33일만의 일이다. 이제 22분의 할머니들만 남은 셈이다. "끝까지 일본 사과 받겠다"던 할머니들의 소원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타국에서 '소녀상'을 보니 눈자위가 얼얼하다. 소녀의 무릎에 포개어진 문구를 읽어보고 손등을 쓰다듬어 보곤 발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음에 갑작스런 설움이 밀려온다. 이런 감정을 노래한 곡을 '엘레지'라고 하던가? 문득 이 시가 생각난다.

다 보여 주겠다는 듯, 어디 한번 내 속을 아예 들여다보라는 듯
낱낱의 꽃잎을 한껏 뒤로 젖혀 열어 보이는 꽃이 있다 
차마 눈을 뜨고 수군거리는 세상 볼 수 있을까 
꽃잎을 치마처럼 뒤집어 쓰고 피어나는 꽃이있다 
아직은 이름 봄빛, 이 악물며 끌어모아 밀어올린 새 잎에
눈물자위로 얼룩이 졌다 피멍이 들었다
얼래꼴래 얼레지꽃 그 수모 어찌 다 견뎠을까
처녀로 끌려가던 연분홍 얼굴에 
얼룩얼룩 얼레지꽃 검버섯이 피었다
이고 선 매운 봄 하늘이 힘겹다 참 고운 얼레지꽃 
 -박남준,「그 곱던 얼레지꽃-어느 정신대 할머니에 부쳐」

높은 산 반그늘에 사는 얼레지꽃은 아침에는 꽃봉오리가 닫혀 있다가 햇볕이 들어오면서 열린다. 오후가 가까워지면 꽃잎이 뒤로 확 젖혀진 게 여인이 치마폭을 걷어 올린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시인은 "다 보여 주겠다는 듯, 어디 한번 내 속을 아예 들여다보라는 듯"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얼레지꽃에서 어린 소녀들이 겪은 수모를 낱낱이 열어 젖혀 보인 모양새를 읽어낸 시인의 시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눈물자위에 핀 피멍의 한을 남긴 채 그 곱던 얼레지꽃들이 다 지고 있으니 풀지 못하고 가는 한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말이 좀 빗나가는 것 같지만 지난 해 이산가족 상봉 기사를 읽으면서 눈에 들어왔던 건 연회 메뉴에 포함된 '얼레지토장국'이란 거다. 얼레지꽃은 나물로도 먹고 뿌리는 구황식물로도 쓰인다고 하니 아마도 얼레지꽃 잎이나 이파리 혹은 뿌리를 넣은 된장국이 연회 메뉴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 아마 북한 토속음식이름이 아닐는지.

'얼레지토장국'이라는 음식 이름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고향은 맛 혹은 냄새로 기억한다고 하는데, '얼레지토장국'은 그야말로 맛과 향, 색감, 소리가 어우러진 공감각적 그리움의 다른 이름 같아서이다. 그것도 이제 가면 다시 볼 날이 기약되지 않은 이산가족 상봉의 마지막 연회에 올려진 음식이라니 참으로 가혹하다 싶다. 그래도 잊지 않기 위해 그 옛날 주고받았던 말을 그대로 답습하고,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음식을 나눠먹기도 한다. 죽기 전에 마지막 잡은 이 체온, 이 살갗의 느낌을 오래 간직하려 마지막 손은 오래 잡기도 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매년 여름 가요코야마 가의 장남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고향집으로 향하는 가족영화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 혹은 그리움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죽음이 아닌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늦은 밤 홀로 밤하늘을 보며 처음으로 돌아가신 아빠에게 속마음을 전하는 아츠시, 오랜만에 모인 자리를 기념하려 가족 사진을 찍는 준페이 가족. 부모님의 산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료타는 딸에게 말한다.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안 죽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라고. 그것은 수년 전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대로 한 말이다. 가족의 역사도 이렇듯 말과 사진, 이야기를 통해 상처와 화해를 반복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현재를 매개로 순환되고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 또한 '소녀상'과 시(詩), 사진과 영화, 들꽃과 음식을 통해 끊임없이 화두로 등장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억울한 죽음일수록 자꾸만 불러내어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나 새로 틔어나는 새싹들에게 그들을 투영해 이름을 붙여줄 때 그들은 두고두고 새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이름들을 다시 불러본다. 유관순, 김마리아, 박자혜, 권기옥, 신정숙. 이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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