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 옆을 지나가는데 구슬손가방을 든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온다. 신산모르를 어떻게 가냐는 것이다. 신산모르 어디를 가시냐고 묻자 서해아파트, 수협 등의 건물 이름을 말한다. 버스정류장 안내시스템이 말해주는 대로 341번을 타시라고 하니, 고개만 갸웃거린다. 안되겠다 싶어 341번 버스가 오는 걸 기다려 타시라고 안내하고 길을 걷는데 자꾸만 할머니 모습이 아른거린다. 

노인들이 살아가기는 참 어려운 세상이다. 가게 간판을 봐도 온통 외래어이고, 영어 제목이 너무 많다. 어디를 찾아 가려고 해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글자들뿐이다. 한글도 아직 서툰데 어떻게 영어를 읽을 수 있겠는가.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도 햄버거 가게에 가서 햄버거 하나 주문하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는 광경을 본 적 있다. 버스안내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다고 해도 출발지와 도착지를 넣어야 검색이 가능한데 노인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시스템인 것이다. '아는 게 힘이다' 라고 말하기엔 특정 개인에게는 너무나 폭력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노인문해교육을 하면서 느끼는 딜레마가 있다. 노인문해교육은 삶 쓰기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글자 자체를 알게 하는 교육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노인들은 삶을 쓰기 이전에 글자를 알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크다. 글자를 빨리 배워 버스 안내판을 읽을 수 있고, 동네 간판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자존감은 간판을 읽을 수 있는가 못 읽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성이 있다. 경쟁심을 부추기는 받아쓰기 시험은 보지 않겠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몰래 받아쓰기 내달라고 부탁하는 노인이 있다. 자신의 존재감을 받아쓰기 100점으로 증명 받고자 하는 것이다. 재미삼아 받아쓰기시험을 보면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려고 손으로 막고 시험을 보는 어르신이 있다. 받아쓰기 시험 풍경은 어른이나 아이나 매한가지다. 말만 안할 뿐이지 눈으로는 "선생님 얘가 자꾸 내거 봐요."라고 일러바치는 것이다. 

한 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 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여인, 새벽 세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 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 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냥 간다 밥 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 <박형준 시,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일부>

사진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을 나누는 시간에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물 길러 다니던 이야기, 물에 빠질 뻔 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 물에 빠진 아이 이야기, 소 물 먹이며 고단했던 시절 이야기…, 등. 그 많은 사연 중에 단연 압권은 한 할머니의 우물에 쓴 글자 사연이다. 글을 배우고 싶어 야학에 나가에 해달라고 부모님께 말했는데, 딸이 글 알아서 뭐하냐며 보내주질 않아 물 길러 우물에 가서 남몰래 울며 우물물에 글자를 써보았다는 사연. '왜 그렇게 물 위에 쓴 글자는 금방 지워지고 마는지' 라며 깊은 한숨과 함께 내쉰 여린 목소리가 지금도 아리게 들린다. 

우물에 쓴 글자 사연을 듣다 셋째 이모를 떠올렸다. 셋째 이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 어느 날 남편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손도장을 찍으라며 찍은 것이 이혼서류였다는 것이다. 일만 하며 살다보니 남편이 이웃 마을에 여자와 딴 실림 차린 것도 모르고 덜컥 손도장 누른 것이 이혼이 되었다며 눈물을 훔치던 그때 그 이야기. 지금이라면 재판 소송이라도 할 일이지만 그 시절은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글을 몰라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치욕이 내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미하엘이라는 청년의 성장과 죄의식, 문맹의 수치를 감추려다 죽음을 선택한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 역)라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을 나치 수용소로 인솔하는 일에 가담하여 재판을 받게 된 한나는 문맹을 감추기 위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되고 결국 20년형을 언도받는다. 감옥에서 그녀는 미하엘이 보내주는 녹음테이프 속 소설을 들으면서 글자를 깨치고 결국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까지 읽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그제서야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일 뿐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겨우 버틸 수 있는 힘은 사랑일 텐데 미하엘도 '그 옛날의 그'는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출소하기 전 날 결국 자발적 죽음을 선택한다.  

출소 이후의 삶을 준비하던 미하엘은 망연자실하지만 그 또한 이미 때는 늦었다. 한나에 대한 사랑을 되돌릴 수 없었듯이 한나도 죄의식을 되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남긴 약간의 돈과 사죄의 마음을 갖고 유태인학살의 생존자를 찾아가고, 한나의 무덤에 꽃을 받치는 일 이외에 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글을 쓴다. 한나의 죽음은 문맹을 수치스러워 한 대가이며 글자를 모르는 문맹보다 더 무서운 건 문맹을 미끼로 한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무책임이었다고. 무사유와 무책임 사이에 무고하고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소설이 「책 읽어주는 남자」인 것이다. 

글은 몰라도 삶은 안다. 문해교육으로 만난 많은 어르신들이 가르쳐준 교훈이다. 하지만 삶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선 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이치이다. 읽고 쓰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달으며 '가갸거겨'를 넘어선 시대에 눈 밝은 쓴 소리를 기대하며 오늘도 가방을 싼다. 삶의 달인들을 만나러 나서는 길이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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