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사유 사물과 풍경 38. 감국 물든 오름에 서서

견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이가 있고, 살 길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가 있다. 무엇이 더 옳다고 할 수 없는 생존의 욕구에 대한 의지 표현의 차이다.

조금만 높이 올라도 숨이 차오르는 무딘 몸을 안고 군산을 오른다. 시간도, 몸도 여의치 않은지라 조금 짧은 코스를 택해 오르는데, 유난히 감국이 눈에 띈다. 감국의 빛깔은 오묘하다. 노랗다거나 누렇다고 하면 삐질 것 같은, 붉은 기가 감도는 색감이다. 산자락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니 따뜻한 감국차 한 잔이 온 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군산을 둘러 싼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마 위에 하늘이, 코앞에 한라산이, 턱 아래 바다가 펼쳐져 있다. 대평리 바다와 박수기정의 절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라산이 바로 코앞이다. 밭 하나를 지나면 한라산에 다다를 것 같다. 산방산과 형제섬이 바다에 띄워진 조각배처럼 보인다. 풍경이 그림에 가깝다고 느낄 즈음, '9번 동굴 입구'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일본군 진지동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9번이라고 하는 걸 보니 적어도 9개 이상의 진지동굴이 이 산 안에 뚫려 있다는 말이다. 산의 심장이 뚫리고 말았으니 겨울이면 몸살이 더욱 심할 터이다. 동굴의 입구로 가 그 안을 들여다본다. 사람 두엇 들어갈 만한 크기에 길이는 꽤 긴 것 같다. 그 안에 숨어 지내던 이들의 심장 뛰던 날들을 생각해본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와 고독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견디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역사의 굴곡, 그 언저리에 새겨진 상처는 팻말 하나로 기억을 대신할 뿐이다. 

산은 제 무게를 견디느라 스스로 흘러내려 봉우리를 만들고 넘치지 않으려 강은 오늘도 수심을 낮추며 흐른다.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왜 견딤이 아니랴 꽃순이 바람에 견디듯 눈보라를 견디듯 작은 나룻배가 거친 물결을 견디듯 엎드린 다리가 달리는 바퀴를 견디듯 적막과 슬픔을 견딘다. 폭설로 끊긴 미시령처럼 생의 건너에 있는 실종된 그리움의 안부를 견딘다.  (남유정, 「견딤에 대하여」)

견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그리움을 찾아 나서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이가 있고, 살 길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가 있다. 무엇이 더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생존에 욕구에 대한 의지가 어떻게 표출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 <스노우 워커>(2003, 찰스 마틴 스미스)처럼 말이다. 

영화 '스노우 워커' 스틸컷

영화는 북극해의 광활한 설원으로 인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비행사 찰리(베리 페퍼 역)는 편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연히 만난 이누이트 가족의 부탁을 받게 된다. 이누이트·소녀 카날라(아나벨라 피가턱 역)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찰리는 상아를 선물로 받고 소녀를 도시 병원으로 데려다주기로 한다. 하지만 비행기는 추락하고 만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두 사람은 북극해의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고 만다. 약간의 식량과 라디오가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마냥 구조대를 기다릴 수 없는 일, 찰리는 이누이트 소녀를 놔두고 무작정 길을 떠난다.

폭풍우와 모기떼에 뜯겨 목숨을 잃을 뻔한 찰리는 금세 쫓아온 카날라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으로, 낯빛으로 서로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나눈다. 어쩌면 문명인이라 할 수 있는 찰리는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물고기를 잡는 것도, 사냥을 하는 것도 그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카날라의 몫이었고, 카날라는 의연하게 척척 문제를 해결하면서 두 사람의 생명을 연명한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카날라의 생명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는 오지 않고, 두 사람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추락지로 향하던 중 비행기의 잔해와 시체를 만난다. 이때 찰리는 비행기 안에서 필요하다 싶은 부속품들을 꺼내면서 기뻐한다. 해골만 남은 인간의 모습은 그에게 하나의 비행기 부품처럼 여겨질 뿐이다. 카날라는 비행기의 진해들과 해골을 모아 돌무덤을 만든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 예를 표하는 방식은 죽은 자의 흔적들을 모아 돌무덤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나 하늘로 돌아간 영혼에 대해 지상에 남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군산을 내려오는데 무덤 하나가 보였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늘로 돌아간 영혼에 대해 지상에 남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일종의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제주의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게 무덤이다. 산 자와 가장 가까이에 무덤이 있는 곳이 제주이다. 오름에도, 밭에도 무덤이 있다. 돌로 담을 쌓아 그 안에 죽은 이의 영혼이 산다. 사람 대신 마소가, 풀과 나무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비석의 문구로서가 아닌, 살아 숨 쉬던 한 인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서의 애도. 그것은 바람의 기도일 것이다. 이제 겨울이라며, 산담 가까이에 있는 보리밥나무가 은백색의 비늘을 털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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