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풍경 42.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하여

설마 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신호등 빨간 불 앞에 서 있는 차들처럼 묵직한 긴장이 돌고 있다. 전국적으로 코로나19감염자가 8,000여명을 훌쩍 넘었고, 제주에도 4명이 확진자로 밝혀졌다. 마트에 갈 일이 있어 서랍에 두었던 마스크를 꺼내 끼고선 길을 나선다. 마스크를 끼니 갑자기 환자가 된 기분이다. 코도 간질거리고, 눈도 침침해진다. 

마트 입구에선 튤립판매대가 진을 치고 있다. 한 다발에 3,000원~5,000원이라고 하니 기웃거릴 만 하다. 그런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체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다. 인파를 뚫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이꽃 얼마예요?"라고 묻는다. 젊은 여성이 "3,000원이에요."라고 대답한다. 나도 삐죽 끼어들며 주책스럽게, "아르바이트생이에요?"라고 물었더니, "딸이에요."라고 대답한다. 경기가 어렵다더니 온 식구가 다 출동한 모양이다. 

튤립, 수선화, 프리지어, 꽃허브, 로즈마리, 히아신스, 물망초…, 하나같이 예쁘다. 들었다 놨다 여러 번 주억거리다 물망초를 사기로 결정한다. 향이 짙은 수선화나 프리지어를 고르려다 물망초의 눈망울에 압도당하고 만다. 물망초 꽃의 빛깔은 왠지 슬프다. 앓고 있는 병을 말하지 못하는 슬픔과 이별을 예감하는 눈물을 머금은 색이다. 

물망초 꽃은 서로 이웃해야 예쁘다. 전체적으로 털이 보송보송 나 있고, 꽃잎은 5장이며, 꽃잎끼리 서로 이웃해 있다. 서로 이웃하지 않고 아름다워지는 법은 없다. 꽃도 하늘과 바람, 햇살과 나무에 기대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톡 건드리면 사르르 꽃잎이 떨어져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장바구니에 담는다.

뭐라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소리 없는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것 같다. 그렇다고 꽃잎 하나마저 보내지 않으려 애써 가둬둘 필요는 없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돌아오고, 그 하나가 다시 떠나면 다른 하나가 돌아오고…, 우주의 원리는 참 신비롭다.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면 의외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것이 영화처럼 다 지나가리라. 돌아서면 아련한 흑백사진처럼. 

나는 국적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다 나는 7월의 클라이맥스를 안다.

나는 7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7월의 음악들을 들으면서 죽어갈 것이다 내 유서는 7월 위에 쓴 나라는 시 한 줄뿐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의 7월은 수장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낀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리아 상이 눈물 흘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차에 치인 사람이 바닥에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장례식차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늪에서 얼룩말이 악어 입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다.

몇백 마일 떨어진 전깃줄 위에 사람 하나 새들 사이에 끼어 날개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창 속에서 누군가 탈고를 막 끝내고 숨이 멎었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저승사자들이 지하철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출생을 알고 찾아온 아들이 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어미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거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골목의 대문 앞에서 누군가 나처럼 서성거리고 오늘, 음악은 참 희곡 같다. (김경주, 「비정성시」 부분)

물망초를 보니, 허우 샤우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에 나온 문청이 생각난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꽃말에서 연상된 게 아닌가 싶다. 영화 <비정성시>는 1945년~1949년, 51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해방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대만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가네 4형제와 대만의 해방전후사가 씨실날실처럼 엮이면서 한 가족의 몰락을 보여준다. 

1945년, 대만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임아록(이천록 분)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장사를 하는 큰아들 문웅(진송용 분), 일본 군의관으로 출정해 행방불명된 문상, 불량배가 된 문량(고첩 분), 청각장애를 가진 문청(양조위 분) 등. 이들은 하나같이 혼란스러운 대만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칼을 맞고 죽는다. 이 모두를 끝까지 지켜보게 된 게 문청이다. 그리고 그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문청은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지식인 친구들에게 비밀처를 제공한다. 친구들은 해방 이후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력과 맞서 민주화를 위한 개혁과 투쟁을 모의한다. 하지만 2.28사건이 터지면서 친구들은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문청도 옥살이를 한다. 더러는 처형당하고, 문청은 가까스로 풀려난다. 감옥에서 나와 친구의 여동생 관미(신수분 분)와 결혼을 하였으나 그의 최후도 씁쓸하다. 관미의 오빠 관영이 체포된 얼마 후, 관청도 체포돼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영화는 문청의 가족사진과 그의 행방불명을 알리는 관미의 편지로 끝이 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까지도 비정하게 몰아세운 대만의 역사. 〈비정성시〉는 청각장애인 문청의 눈을 통해 대만의 슬픈 역사를 똑바로 보여주고 있다. 관객은 문청이 전하는 메모와 편지를 숨죽이며 함께 읽는다.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갑니다. 생사는 하늘에 달린 것 슬퍼하지 마십시오", "너희들은 삶을 중요시해라. 아버지는 죄가 없다"…. 등장인물들이 남긴 편지내용은 말 못하는 벙어리 가슴인, 대만 민중의 억울함이기도 하다. 죽음 앞에서 남긴 이들의 유언은 나를 구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근대 대만 지식인의 고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점을 역설하는 은유이다.

영화 〈비정성시〉가 아름다운 것은 피의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널리, 멀리, 보여주는 무심한 화면 때문이다. 화면 속에서 자연은 아무 말 없이 배경에 스며들고 있다. 바람에, 햇살에, 하늘에…. 서로 어우러지면서, 또 하나의 그림을 만들면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꽃은 피어나고 지고, 다시 피어나듯이 역사도, 삶도 어김없이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야 함을 자연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집안으로 들여온 물망초는 며칠 동안 내 것인 것처럼 눈호강을 부리겠지만 얼마 안 있어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원래 꽃은 자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생명은 지속가능하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