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왔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배달되었다. 그 옛날 우물가 같은 수돗가 에 살얼음이 얼어 새들도 왔다가 돌아간 모양이다. 새들이 부리를 쪼려다 어리둥절하는 풍경을 떠올리니 잠시 미소가 흐른다. 사람이 참 얄궂다. 아침마다 목축이던 물가가 얼어버렸으니 새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고요하지만 실상은 살얼음을 걷는 시초를 다투는 긴박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집안에 돌봄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으레 겪게 되는 긴장감이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삶은 변함이 없는데, 개인적 신상 또는 가족의 상황에 변수가 생기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얼마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의 일처럼 여기던 것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어깨에 무게감을 덜고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들은 실상은 더 큰 무게로 짓누르고 있음이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와 자기 문제가 되었을 때의 심리적 결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그러나저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안도현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 전문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면서도 흙탕물 뒤집어쓴 진눈깨비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남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문제가 아닌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돌아보면 비루함의 연속이다. 남의 눈에 내리는 함박눈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늦은밤에 쓰는 일기장 속의 문장이었을 뿐이다. 

삶이라는 지도를 펼쳐보면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가(家)로 갈아타기 위한 전력질주가 전부인 모양새다. 숱하게 지나온 간이역에서는 매사 진눈깨비가 흩날렸던 것 같다. 차라리 싸라기눈이 나을 법도 한데 진눈깨비가 날리면 왠지 발 내딛기가 두려워진다. 질척거리며 튀는 검은물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렇다. 마치 광산에 고립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같다. 

이란의 알리레자 아미니 감독은 고독감과 소외감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 '바람에 쓴 편지'는 군인들의 고립과 소외를, '광산에 내리는 진눈깨비'는 광산 근로자들의 고독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자유와는 거리를 둔 고립되고 서글픈 삶 가운데서도 따스한 햇살을 그리기를 선호하는 이란영화의 풍토 속에서 알리레자 감독은 다소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영화 '광산에 내리는 진눈깨비'는 두 광산 관리인의 삶을 관찰자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뒤덮고 있는 깊은 적막은 진눈깨비를 닮았다. 한가롭고 고요하지만 마음은 스산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오히려 거치적거리는 소음이다. 문이 흔들리는 소리, 먼 데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 나뭇가지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 등이 오히려 이들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살얼음에 잠긴 물고기처럼 말이 없는 그들에게 주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는 그가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하는 유일한 증명이다. 영화 속에서 두 남자는 외로움을 달래줄 것 같은 개와 여자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들은 "여자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눈밭에서 뒹군다. 스스로 진눈깨비가 된다. 

겨울의
불안한 태양 밑에서.
물고기는 죽지 않으려고 헤엄을 친다.
영원히 같은
물고기의 방식으로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얼음덩이 속에 머리를 기대고
차디찬 물속에서
얼어붙는다.
(중략)
물고기에 대한 시(詩)도
물고기처럼
목구멍에 걸려
얼어붙는다.
조셉 브로드스키의 시, 「겨울 물고기」 부분 

현실을 현실로 인정할 때 찾아오는 자유! 살얼음이 덮인 걸 보고 말없이 돌아가던 새와 개, 살얼음 속에서 서로의 머리를 기대는 물고기들. 비로소 위안을 얻는 시 한편을 발견하곤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지팡이를 든 어머니가 입을 꾹 다문 채 주간보호센터 차가 오나 안오나 동동 기다리는 모습에서 나는 물고기의 침묵을 본다. 목구멍에 걸려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시(詩)를 본다. 구부러진 시가 겨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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