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마당 한 켠에 별의별 꽃과 나무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앵두나무, 사과나무, 감나무는 나뭇잎을 다 떨구어내 겨울맞이를 하고 있다. 상추는 씨를 받으려는지 대가 올라오도록 놔두고 있고, 배추는 잎이 벌어져 노끈으로 친친 감아 있다. 파는 잦은 비에도 잘 자라고 있고, 시금치와 유채는 아직 땅바닥 가까이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같은 계절인데도 텃밭식구들이 사는 모양은 다 다르다. 사람들만 같아지려고 애를 쓴다. 

며칠 무리했는지 밤새 몸살을 앓았다. 어머니는 파뿌리를 끓여 마시라고 자꾸 권한다.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뼈마디가 쑤시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 새벽녘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내 몸은 살고 싶은 거구나.'라고. 의식이 살고 싶은 건지 몸이 살고 싶은 건지 사실 분간이 되진 않는다. 굳이 구분하려 애쓰며 에너지를 쓰고 싶진 않다. 다만, 몸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목울대에서 가르랑가르랑 넘어오고 있지 못하는 말, 그것은 손 내밀어도 다가오지 않는, 어떤 서러움의 일종인 것 같아 침울해진다. 

마음보다 먼저 몸이 절벽이네
몸에도 절벽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
절벽에 서니
내 의지 오히려 약하지 않네
병동은 드높고 흰옷들 눈부셔
바람 없는 나의 생각들 나를 감당하네
주유하는 주유소처럼
링거를 꽂던 간호사들
다른 병실로 옮겨가고
나 아직
뼈를 가는 어둠을 가졌으니
두근거리며 오는 것은 두통이나 오한뿐
병은 나를 지배하려 드네
몸이 발전소는 아니었던 것이네
침묵보다 병이 무거운 시간
회의란 할수록 회의적이네
무슨 문제가 내게 있었던 것일까
문제라면
몸에 병 없기를 바란 것이 문제라네
병 없기를 바라 몸에 탐욕이 생긴 것이네
그래서, 내가 나에게 말하기를
병고(病苦)로써 나를 다스리라 하였네. 
천양희 시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전문

시를 읽는 동안 두어 번의 반성과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 몸을 기름만 부으면 움직이는 자동차 엔진처럼 대한 건 아닌가 하는 반성, "침묵보다 병이 무거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뼈를 가는 어둠"은 괴롭다. 두통이나 오한은 그런 괴로움이 엄습할 것을 두려워하며 미리 벌벌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미리 알고 문간방에서 손을 길게 뻗어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병고로써 나를 다스리기"엔 몇 번의 더 뼈를 가는 어둠이 필요할 터이다. 아니면 영화 '열병의 방'에 몇 번 들어갔다 나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는 기이하고 흥미롭다. '열병의 방'은 극단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몽환적이면서 현실적인 이미지들과 나레이션이 교차적으로 떠돌면서 꿈과 환상을 넘어 무의식으로 침투한다. 가교역할을 하는 것은 음향인 것 같다. 영화인지 설치미술인지를 방불케 하는 실험적 구성과 기술적 조작이 전위적이다. 카메라의 시점이 다방향이고, 시공간이 다층적이어서 멀미를 할수밖에 없다. 스토리를 따라가려고 하는 의식은 금세 길을 잃고 될 대로 되라며 몸을 맡기게 된다. 

'열병의 방'이 묘미가 있다면 공간 그 자체가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다, 파도, 동굴로 이어지는 공간의 연결, 그리고 랜턴과 성냥, 빗소리, 소리…. 암흑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내 몸에서 나는 소리 같다. 다하지 못한 울부짖음 같은 것. 그리고 갑자기 스크린이 올라가고, 카메라가 관객을 비추고, 관객은 객석을 바라본다. 암흑의 공간으로부터 빛과 연기로 구성된 객석 속 무대가 창조된다. 환상적인 영화적 무대연출이다. 영화가 너무 영화스러워서 영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혼란스러워서 투명해진다. 마치 싸움을 끝내고 난 뒤 모든 것이 자명해지는 것처럼.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 해진다.
치열하게
비어 가며
투명 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최영미 시, 「사는 이유」 부분

내 의식과는 싸우되 몸과는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이 아님을 인정해야겠다. 싸울 수 있다는 건 분명 건재하다는 뜻이다. 아프면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만다. 진통이 있다는 건 그나마 살아 있다는 증명일텐데 그마저도 심해지면 사는 이유를 버리고 싶어질 것 같다. 사는 이유를 스스로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내 몸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더 많아져야겠다. 마침표도 찍기 전에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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