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철 정치경제부장

1970년 12월 15일 서귀포와 부산을 오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했다. 새벽 1시15분께 선체가 기울기 시작해 불과 10분만에 전복됐고, 생존자들은 뒤집힌 배에 매달리다가 배가 가라앉은 후에는 빈 귤상자를 붙들었지만 12월 영하의 겨울바다에서 구조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338명의 승객 가운데 323명이 희생됐고 이중 305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올해로 53주기를 맞은 우리나라 최대의 해양참사 '남영호 침몰 사고'다. 사고가 발생하기 하루 전인 12월 14일 남영호는 서귀포항에서 승객과 감귤 등을 싣고 출항해 성산항에서 추가로 승객과 화물을 싣고 밤 8시10분께 부산으로 출항했다. 당시 정원 290명보다 많은 338명을 승선시키고 적재정량보다 많은 화물 수백t을 싣고 무리하게 운항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과도한 화물 적재로 성산항을 떠나는 시점에 이미 선체가 불안정한 상태였고, 사고 현장은 급한 조류가 흐르는 수역이었다.

운항 과실 외에 국가의 해양사고 대응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남영호에서 침몰 당시인 1시20분부터 25분 사이에 비상주파수로 수차례나 구조신호(SOS)를 타전했지만 전달되지 않았다. 일본해상보안본부는 구조신호를 수신하고 한국 해경에 무선으로 수차례 연락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무전실 당직자가 근무지 이탈로 조난 신호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고 소식도 일본내 보도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사고 후 9시간이 지나서야 관계 당국이 인지했고, 사고해역에서의 구조활동도 일본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오전 8시부터 시작한 반면 한국 해경의 구조선은 오후 3시를 넘어 현장에 도착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에 남영호 참사는 적재량을 초과한 과적, 항해 부주의, 긴급신호 발신 후 신속하지 못한 대처 등으로 피해가 컸던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평가되고 있다.

결과는 참혹했다. 338명의 승선자 중 15명만 살아남고 323명이 사망해 우리나라 최대의 해양참사로 기록됐다. 어두웠던 군사정권 시절 제대로된 진상조사와 피해 회복 조치가 이뤄질리는 만무했고, 미미한 희생자 보상금으로 유가족과 관계자들을 입막음하는데 급급했다.

현재는 남영호 조난자유가족회가 2013년 재결성됐고 ㈔남영호기억과추모사업회(이사장 윤봉택)는 참사 53주기 제4회 추모예술제를 오는 15일 천지연폭포 칠십리 야외공연장에서 개최하는 등 진실 찾기와 위령제, 추모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아직도 남영호 참사의 진실은 어둠 속에 묻혀 있고, 도민이 다수인 유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남영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피해회복 조치를 했다면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등 선진국이 된 후에도 끊이지 않고 발생해온 대형 사고들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의 안전불감증을 해소하는 한편 안전과 관련한 철저한 제도 정비 및 실행 점검 등 관련 조치가 뒤따랐을 것이다.

제주도정과 정치권에서는 남영호 침몰사고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추모사업을 위한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관련 조례 제정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이는 53년째 해결되지 못한 남영호 참사 유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과거사로 치부하지 않고 철저히 원인과 과정을 조사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대책을 마련하는데에 더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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