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내려오다 잠시 쉬면서 얼굴에 붙은 모래알갱이를 털어낸다. 앞산을 집어삼킬 태세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파도 너머의 화려한 집들은 미세먼지에 싸여 흐릿하다. 집과 산과 바다가 안개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설명절을 맞아 관광지는 북적대지만 '집에 남아 있는 개나 고양이들은 독거노인처럼 외로울 것이다'는 생각을 할 때, 줄에 묶인 개 한 마리가 헥헥거리며 산을 내려간다. 그 뒤를 따르는 주인은 연신 지적질이다. "이월아, 이월아, 거기로 가면 안돼". 이월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면 "왜 이월이에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입춘이 지나갔다는 걸 나무들은 몸으로 안다
한문을 배웠을 리 없는 산수유나무 어린 것들이
솟을대문 옆에서 입춘을 읽는다
이월이 좋은 것은
기다림이 나뭇가지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동쪽에는 허벅지까지 습설(濕雪)이 내려 쌓여
오르고 내리는 길 모두가 막혔다는데
길가의 나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삼월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월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
녹았던 물을 다시 살얼음으로 바꾸는 밤바람이
위세를 부리며 몰려다니지만
이월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그때마다 볼이 빨갛게 언 나를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월이 슬그머니 옆에 와 내가
바라보는 들판의 푸릇푸릇한 흔적을 함께 보고 있다
(도종환 시, 「이월」 전문)

시를 읽다 어느 한 구절이 맴도는 경우가 있다.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는 대목처럼 말이다. 이월이 좁은 벤치의 한 곁을 내 준 이의 어깨와 같은 기분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머리 속에서는 자꾸 "이월(移越)하면 안될까요?"하는 물음이 맴돈다. 나는 무얼 이월하고 싶은 걸까? 오래 꼬불쳐둔 바람에 휙휙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그 어떤 것이 내 안에 있는 걸 아닐까 하고 의심해본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면서 그 정체의 일부를 본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월트 디즈니 월드는 '플로리다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어진 현실 속 마법의 세계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라도 다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의 공간이어서 어린이들의 세계와 맞닿는다. 하지만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주인공 무니(브루클린 프린스 역)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눈으로만 힐끗힐끗 곁눈질할 수밖에 없다. 그곳은 자본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즈니월드의 후미진 곳에 살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로서 그림의 떡이 월트디즈니이다. 

할 수 있고 없고, 가질 수 있고 없고의 규정성이 불명확한 6세 무니는 월트디즈니 그림자 안에서도 자유롭게 뛰놀고 '쓰러진 나무의 신비로운 생명력'을 감지한다. 그리고 지적질하는 어른들에게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른의 눈으로는 범죄에 가까운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아직 그에게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법은 어른들의 세계다. 그래서 무니를 건강하게 양육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엄마 헬리(브리아 비 나이트 역)와 무니를 떼어놓으려 한다. 이 사회는 무니를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나?

아동보호국에서 무니를 데려가려 할 때 무니가 달려간 곳은 친구 젠시(발레리아 코토 역)의 집이다. "있잖아…, 잘 있어"라며 눈물을 쏟아내는데, 젠시는 무니의 손을 잡고 디즈니월드로 달려간다. 할머니 밑에서 기죽어 지내던 젠시도 무니 덕분에 자유와 모험, 용기를 배웠다. 이별의 고통을 직감하는 순간, 젠시는 친구의 손을 덥썩 잡고 구원의 세계로 안내한다. 어쩌면 현실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무니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크리틱스 초이스 최연소 아역상을 받은 아역배우 브루클린 프린스는 이렇게 소감문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니와 스쿠티와 같은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들을 도와주세요."라고. 7세 아역배우의 소감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고통스럽다. 엄마도, 사회도 무니와 같은 아이에겐 안전하지 못하다. 밥을 먹여주고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난 너와 함께 할거야"라는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무니가 다하지 못한 말을 따라해본다. "내가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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